Friday, October 31, 2014

요시모토 바나나- N. P.: 2014. 10. 31

26. 얼음주머니로 반은 가려진 시야, 고개를 움직여 창 밖을 보니 저녁 노을이었다. 핑크 빛 구름이 선명한 층을 이루며 저 너머 서편으로 이어져 있다. 순간, 열에 들뜬 머리로, 뭐가 현실에서 일어난 일인지 알 수 없게 되었다.
아버지가 집을 떠나, 이제는 다른 곳에서 가정을 꾸리고 있다는 것. 매일 밤 영어 공부를 한다는 것. 함박눈이 내려 교정이 온통 순백색으로 뒤덮였었다는 것.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이미 열 기운에, 가로등 불빛이 뽀얗게 보였다는 것.

28. 그날은 비가 내려, 학교에서 돌아온 언니와 나는 둘이서 전기난로를 사이에 두고 엄마가 돌아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드러누워, 잡지를 읽는 언니 쪽을 망연히 바라보고 있었다. 언니는, 팔락팔락 하고 물방울이 떨어지듯 일정한 간격으로 페이지를 넘겼다. 옆집에서 울리는 TV 소리가 빗소리에 섞여 들려왔다. 창문은 김으로 뽀얗고, 방은 더울 정도로 따뜻했다.

103. 이따금 상태가 안 좋을 때에 생각한다. 만약 부모가 헤어지지 않았더라면, 만약 독신생활이 이렇게 장기화하지 않았더라면, 만약에 그때에 언어에 눈뜨지 않았더라면, 쇼지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런 얽힘이 없었더라면, 나는 본래의 나였을까? 자유로운?

145. 흘러가는 시간을 뼛속 깊이 사랑스럽게 느낀다.

149. 옜날, 사람과 사람의 관계는 이렇지가 않았는데 말이지. 모두들 언제라도 한가하고 상냥했었어.

그렇다면 그녀의 매력은 무엇일까?
저 어딘가 색다른, 자립해 있는 재능의, 자기 충족적인 무언가. 타자와는 결코 나눌 수 없는. 그녀 자신만의 내면의 고뇌 같은 것. 몇 사람에게만 통하는 강력한 신호.

236. 스이가 어째서 살아 남으려고 했는가. 그런 까닭 따위 아무도 모른다. 살아 남아야만 하다고 느끼게 하는 것, 어째서 사는가? 그런 질문 따위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하게 하는 것, 삶과 죽음에 대해 생각하기를 멈추게 하는 그 무엇, 우리들은 그것을 늘 찾고 있는 것이다.

Saturday, October 11, 2014

에쿠니 가오리- 마미야 형제: 2014. 10. 12

84. 매미가 운다. 저녁 나절인데도 하늘은 아직 푸르고 여름 냄새가 난다.

121. 욕실 문을 열고 문지방을 넘어서서, 샤워 꼭지를 틀며 생각한다. 내가 좋아하는 남자는, 좋아했던 남자는, 내 몸을 마음에 들어 했을까. 한순간이라도 좋아. 다른 누구에게도 양보할 수 없는, 세상에 단 하나뿐인 존재로서 사랑해 주었을까?
세상에 단 하나가 아닌, 흔해 빠진, 어찌되든 상관없다는 듯이 아무렇게나, 요리코는 자신의 몸을 씻는다. 깊은 밤, 바깥에서 빗소리가 들려온다.

155. 가을은 쿠즈하라 요리코가 좋아하는 계절이다. 긴소매 셔츠의 산뜻한 감촉이 기분 좋다. 타이츠에 가죽 구두를 맞춰 신으면 발걸음도 힘 있고 등줄기가 꼿꼿이 펴지는 느낌이 든다.

224. 아무것도 모르면서 좋아하는게 아니라,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에 좋아하게 되는 건 아닐까. 아무것도 모르는데 마음이 끌리기 때문에, 좀 더 알고 싶어져서 다가가려는 게 아닐까.

245. 혼마 나오미는 추운 계절을 좋아한다. 눈이 내릴 정도로 추운 계절이 아니라, 그 직전의 딱 요맘때 같은 날씨. 공기가 팽팽하고 맑아서, 자신의 피부까지 투명해지는 느낌이다. 낙엽을 밟으며 걷는 감촉도 무척 근사하다.

288. 자신 안에서 너무나 많은 행복을 이끌어 낼 줄 아는 형제에게, 오늘과 내일은 언제나처럼 소박하고 즐겁게 흘러간다. 가끔은 의기소침하게 흘러갈지라도 이들에게는 연애와 또 다른 담백한 인간 관계가 있다. 추억을 나누고 즐거움을 나누고 일상을 나누는.. 어쩌면 현실에서는 그렇게 담백한 인간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연애에 빠지는 것보다 어렵지 않을까.
이 겨울, 따뜻하고 유쾌한 기운이 살아 숨쉴 것만 같은 형제의 집에 초대 받아 가고 싶다는 마음이 새록새록 들면서, 쉽게 달라질 것 같지 않은 형제의 그 후 이야기가 벌써부터 기다려진다.

Friday, October 10, 2014

요시모토 바나나: 허니문 - 2014. 10. 9

22. 밖에서는 태양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는데, 복도는 캄캄했다. 곰팡내와 향 냄새가 섞인 듯한 냄새가 났다. 그 조금은 서양식 분위기가 나는 낡은 일본식 집은, 천장이 매우 높았다. 빛은 모두 틈새로만 새어들고 있었다. 그 탓에, 여름이, 생명의 힘이 멀게 느껴졌다.

31. 짐으로 창문이 절반이나 가려져, 창모양의 절반만큼, 희미한 빛이 네모나게 다다미에 비치고 있었다. 나는 거기를 떠다니는 빛나는 먼지를 보면서 '그냥' 이라고 말했다.

32. 올리브와 함께 아직 젖은 채 빛나고 있는 길을 걸었다. 갑작스럽게 내린 비라서, 벚꽃이 우수수 떨어져 있었다. 동네 고등학교 옆을 오르는 벚나무 가로수길은 온통, 막 떨어진 예쁜 모양의 꽃잎으로, 분홍빛 카펫처럼 장식되어 있었다. 지는 햇빛을 받으며 서 있는 나무들에는 아직도 흐드러지게 꽃이 피어 있고, 물방울을 매단 채 싱그럽게 빛나고 있었다. 길에는 아무도 없고, 세계는 마냥 호화스런 금빛과 분홍빛 광선으로 가득하여, 이 세상이 아닌 듯한 광경이었다.
'올리브, 벚꽃 참 예쁘지'
하고 나도 모르게 말을 걸었다. 그러자 올리브는 새카만 맑은 눈으로 나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마치, 금빛지는 해보다, 벚꽃보다, 나를 보고 싶다는 표정으로. 그런 눈으로 보지 마, 하고 나는 생각했다. 보물과 줄줄이 이어지는 산과 바다를 쳐다보는 듯한 눈, 죽음은 딱히 두렵지 않다, 다만 너와 만날 수 없게 되는 것만이 안타깝다, 그런 눈이었다. 사실은 나도 올리브도 알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날의 분위기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모든 것이 너무 아름다웠다. 이미 볼품없어진 올리브의 털도, 금빛이었다. 모든 것이 우리 둘이 어린애였던 시절로 돌아가는 듯한, 어느 쪽이나 영원히 살아갈 듯한 느낌이 들었다.

49. 무지개를 만들면서, 흙탕물에 비친 아름다운 하늘, 흐르는 구름을 보면서 나는 생각했다. 이렇게 사소하고, 웃어넘겨 버리는 일이, 인생을 구성하는 세포라고.

72. 인생에는 때로, 그 사람이 원한다면, 하고 모르는 척하고 있을 수만은 없는 일이 있을지도 모른다. 직감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무언가를 위해 필사적이 되거나, 자신이 미덥지 않아도, 정체를 알 수 없는, 훗날이 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행동을 무슨 일이 있어도 하는 편이 좋은 일도 있을지 모른다.

89. 무언가가 우리만 두고 떠나간 듯한 느낌이 들어, 잠시 멍하고 있었다. 날씨는 좋고, 히로시의 오래된 집, 샤워기도 없는 목욕탕에 물을 받아, 환한 속에서 물에 잠겼다. 유리창에 김이 서려, 태양빛을 부옇게 통과시키고 있었다. 낡은 타일 특유의, 정겨운 색조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97. 혹 나의 많은 것들이 전부 잘못된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될 때, 나는 역시 늘, 사계절의 변화가 마치 다도처럼, 어디 한 군데도 빈틈없이 한 가지 일이 그 다음으로 흘러가는 것을 늘 뜰에서 보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피고 지는 꽃도, 땅으로 떨어지는 낙엽도, 그 다음에는 모두 어느틈엔가, 먼 곳에서 연결되어 있다. 인간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을까, 생각하고, 마음을 다잡았다.

105. 마술 같은 파란색 공기에 서서히 아침 햇살의 명랑한 기운이 섞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새벽은 무엇을 고백해도 용서받는 애매한 시간이었다. 꿈과 현실의 경계에서, 히로시는 그저 울기 위해 울었다.

114. 그냥 보통 때처럼 하고 있는데 무리를 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면 문제, 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러나, 나한테는, 언제나, 대개의 경우, 모두가 무리를 하고 있는 듯이 보였다. 왜 그렇게들 애를 쓰는지, 무엇을 향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렇다고 내 인생이 그렇게 멋진 일들로 충만해 있는 것도 아닌데. 나의 인생은, 뭔가 반짝반짝하는 것이 지나가고 난 다음의, 아련하게 반짝이는 꼬리 부분만을 향유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124. 그리고 눈이 내릴 것처럼 추운 긴자 거리를 걸어, 호텔까지 데려다 주었다. 엄마는, 있지, 마나카짱, 손 잡아도 돼? 라고 물었다. 나는 새엄마나 히로시와도 그런 적이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엄마는 억지로 내 손을 잡았다. 할 수 없어서, 마음을 바꾸어 즐겁게 걷기로 하였다. 그 손의 따스함과 공기의 싸늘함, 길 가는 사람들의 하얀 숨, 밤하늘을 배경으로 솟아 있는 와코 백화점, 미츠코시 백화점을 올려다보며 어째 외국 같네, 하고 생각한 것도, 잡은 손을 앞뒤로 흔들며 노래를 불렀던 일도, 정작 그때는 별일 아닌 것처럼 여겨졌는데, 인상에 깊이 남아 있다. 즐거웠던 것이다.
지난 일을 떠올리며, 그때 느꼈던 것보다 훨씬 더 즐거워질 수 있어, 그 사람의 소중함을 아는 때가 있다.

150. 세계는 나 따위 어떻게 되든 아무 상관 안하지만, 세계는 재미있고 아름답고 애정 같은 것으로 넘치고도 있고, 뭐가 있을지 몰라서, 그 안에서 헤엄치고 있는 나는 조금도 불쌍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어. 내가 밤바다를 떠다니는 천사 같은 기분이 들었어. 동네의 불빛도, 물도 별도 또렷하고 선명하고... 너무 천진난만하고, 청렴하고, 보호받고 있는, 떨고 있는 조그만 존재로 여겨졌어. 아주 멋진 장소에 있는 듯한... 그후로는, 전후를 불문하고 그처럼 감동적이고 아름다운 것을 본 적이 없다.

156. 강렬한 햇살 속, 별장으로 향했다. 새하얗고 낡은 별장이었다. 창문으로 여러 나라에서 온 신혼 부부와 돌고래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해변을 산책하고, 몸을 태우기도 하고, 다이빙을 즐기는 모습이 보였다. 섬의 태양빛은 물보다 몇백 배 정도는 하얗고, 몸 속까지 그 빛으로 넘칠 듯하였다. 천장에서는 천천히 선풍기가 돌아가고, 그 그림자가 바닥에 부드럽게 드리워져 있었다.
'너무너무 멋지다. 나, 이렇게 멋진 곳에 와보기는 처음이야. 빛은 강하고, 모래는 하얗고, 바다는 아름답고, 사람들은 모두 즐거워 보이고, 마치 천국 같아. 꿈속에서 보는 풍경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