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July 27, 2014

에쿠니 가오리- 낙하하는 저녁: 2014. 7. 28

13. 가령 두 사람 사이에 생기는 혐오감 내지는 권태감 같은 것을, 한쪽은 느끼는데 다른 한쪽은 느끼지 않을 수 있을까. 다케오는 과연 언제부터 헤어짐을 생각한 것일까.

16. 나는 다케오가 나간 후에도 울부짖지 않았다. 일도 쉬지 않았고 술도 마시지 않았다. 살이 찌지도 야위지도 않았고,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긴 시간 수다를 떨지도 않았다. 무서웠던 것이다. 그 중 어느 한 가지라도 해버리면 헤어짐이 현실로 정착해버린다. 앞으로의 인생을, 내내 다케오 없이 혼자 살아가야 하다니, 나로서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29. 나는 망령이었다. 다케오가 스티브가 이 세상을 사는 사람이라면, 나는 이 세상을 살지 않는 사람. 물 흐르듯 일상을 살면서도 망령인 내게는 돌아갈 장소가 없다. 간단하다.
다케오 옆에 누가 있든 상관없었다. 다만 나는 다케오의 것이다.

37. 그 다음주는 내내 날씨가 화창했다.
너무 규칙적인 생활을 하는 탓에, 변화없는 날씨가 감각을 뒤틀어 놓는다. 어제와 오늘, 오늘과 내일의 구별이 불분명해진다. 하기야 그런 편이 내게는 편했다. 하루하루의 윤곽이 흐릿하면 흐릿할수록 매사에 대한 인식과 현실감도 엷어진다.

47. 집 안으로 들어가자 하나코가 거실 소파에 축 늘어져 자고 있었다. 바닥에는 하얀 액체가 남아 있는 컵. 창문이 열려 있어 저녁 바람에 커튼이 흔들린다. 낮이 참 많이 길어졌다.
"감기 걸리겠네."
불을 켜고 말하자, 하나코는 일어나 나른한 목소리로, 어서 와, 라고 말했다. 어서 와. 어린애 같은 말투. 나는 가슴이 벅차오른다. 1밀리그램의 오차도 없이, 언어가 정확한 중량을 지니고 있다. 그렇게 정확한 무게의 '어서 와'를 오랜만에 들어본다.

49. 하나코는 동물 같지도 식물 같지도 않다.
바로 옆에 있는데도, 그 사실을 의식하게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살아 있음의 겨추장스러움이 없는 사람, 생기가 없다는 뜻에 아주 가깝다. 그러면서도 음침한 느낌은 없고, 오히려 건조하고 밝다.

51. 하나코는 고립돼 있었지만, 관대했다. 목욕탕에서 이따금 콧노래 소리가 흘러나왔다. 우리는 저녁밥을 같이 먹었다. 정말 이상한 일이지만 하나코는 전혀 거슬리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130. 하나코는 모른다. 이때 나는 확신했다. 한 남자와 인생을 공유할 때의, 흔해빠진 일상에서 길어 올리는 행복, 믿지 못할 기적 같은 순간의 축적.
예를 들면 겨울 아침, 다케오 옆에서 당연한 일이듯 눈을 뜨는 것. 차가운 발을, 건장하고 따스한 생명력에 넘치는 다케오의 발에 휘감을 때의 안심감. 뿌연 유리창. 시간이 멈춰버린 듯한 몇 분.
예를 들면 역에서 거는 전화. 일을 끝내고 돌아오는 다케오의 목소리. 드러누워 열심히 추리 소설을 읽고 있던 나는, 그 순간, 모든 것을 떠올린다. 만남에서 그때까지의 모든 것을.
그런 것들을 당연하게 여길 수 있는, 넉넉함.
하나코는 모른다. 바란다고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

168. 그날, 목욕탕에서 나는 오랜만에 거실에 하나코가 있는 느낌을 만끽했다. 그것은 아주 자연스럽고 특별한 느낌이었다. 하나코는 아마도 소파에 누워 만화잡지를 열심히 읽고 있으리라. 아까 메밀 국수를 먹고 돌아오는 길에 편의점에 들러 산 잡지다.

하나코를 묶어둘 수 있는 곳은 어디에도 없다. 하나코에게는 도리라는 것이 없다.

176. 다들 너를 만나고 싶어해. 왜 그럴까. 너는 다른 사람한테는 티끌만큼도 신경 안 쓰고, 아무 목적도 없이 홍콩 같은 데나 훌쩍 다녀오고 그러는데.

Saturday, July 19, 2014

에쿠니 가오리 - 호텔 선인장: 2014. 7. 19

154. 그러나 사실, 모자는 이 아파트가 좋았습니다. 키작은 나무가 멋없게 심어져 있는 마당이며, 어둑어둑하니 선선한 현관 홀, 밖에서 돌아왔을 때 느끼는, 꼭 좋다고는 말할 수 없는 습기 배인 독특한 냄새. 덜컹덜컹, 놀랄 만큼 큰 소리를 내며 움직이는 엘리베이터.

요 며칠 모자를 고민하게 만드는 것은 '덧없음' 자체가 아니라, 자신이 어느새 그것을 완전히 잊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요시모토 바나나 - 도마뱀: 2014. 7. 15

17. 자기가 사는 역에 이제 두 번 다시 내리지 않아도 괜찮아.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인걸.

52. 죽는다는 건 뭘까? 존재가 없어져서 아무 말도 해주지 않고, 지금의 여기에 푹 파묻혀 있는 코의, 바로 그 짓누르는 힘의 원천. 그렇게 하고 싶다는 의지를 담은 그릇. 그것이 사라져 없어지는 것.

72. 사실은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이 손발로 느끼고 실현시키기 위해서 우리는 육체를 가지고 태어났기 때문에.


요시모토 바나나 - 티티새: 2014. 7. 3

44. 인생은 연기, 라고 나는 생각했다. 의미는 똑같아도, 내게는 환상이란 말보다 친근한 느낌이 들었다. 그 저녁, 사람들의 물결 속에서 아찔하도록 그것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한 사람의 인간은 온갖 마음을, 모든 좋은 것과 더럽고 나쁜 것의 혼재를 껴안고, 자기 혼자서 그 무게를 떠받치고 살아가는 것이다. 주위에 있기 좋은 사람들에게 가능한 한 친절을 베풀 수 있기를 바라면서, 혼자서.

48. 그래도 가끔은, 잠이 안 올 정도로 바다가 그립다. 도무지 어쩔 수가 없다. 종종 가는 긴자 거리에서는, 바람의 방향에 따라 불현듯 바다 냄새가 코끝을 스칠 때가 있다. 거짓말도 아니고, 허풍도 아니고, 그 순간 나는 소리를 지를 뻔한다. 온몸이 순식간에 그 냄새에 빨려들어 옴짝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슬퍼진다. 울고 싶어진다. 그런 때는 거의 늘 날씨가 맑고, 투명한 하늘이 한없이 이어지고, 나는 손에 든 야마노 악기와 쁘렝땅 백화점의 쇼핑백을 내던지고 달려가, 소금 냄새가 눌러붙은 그 더러운 제방에 서서 한껏 바다 냄새를 맡고 싶어진다. 이렇게 강렬한 충동도 언젠가는 희미해질 것이라는 아픔, 이것이 향수라는 것일까.

53. 츠구미는 나를 보면서 웃었다. 오후의 방에서, 책을 읽으려고 켜둔 불빛이 유독 하얗게 빛나고, 내내 나직한 멜로디가 흐르고 있었다. 테이프가 다 돌아갈 때까지 귀 기울이며 우리는 조용히 잡지를 읽었다. 고요한 방에, 책장 넘기는 소리가 팔락, 팔락, 한없었다.

57. 어차피 사람은 언제 어디에 있든 어느 정도는 외로운 이방인이라는 것을, 멀리 항구각 보일 때면 분명하게 알게 되기 때문이리라.

61. 열린 창, 방충망 너머로 해수욕을 하고 돌아오는 사람들이 몇 번이나 지나갔다. 웃음소리가 밝게 울린다. 동네 여관에서는 다들 저녁 식사 시간을 맞을 즈음, 온 동네에 활기가 넘친다. 아직 하늘은 밝고, 텔레비전에서는 저녁 뉴스가 흘러나온다. 바닷바람 냄새가 다다미를 스치고 지나간다. 복도에서는 분주한 발소리가 오가고, 목욕을 하고 나온 손님들이 왁자지껄 지나간다. 먼 바다에서는 갈매기 울음소리가 들리고, 창밖을 올려다보자 전선 사이로 가슴이 덜컥 내려앉을 정도로 빨간 하늘이 보였다. 모든 것이 너무도 여전한 저녁이었다.
영원히 계속되는 것은 없다, 는 것을 알고는 있었ㅈ만.

62. 하루하루, 이렇다 할 만한 일은 없었다. 이 조그만 어촌에서, 자고 일어나고, 밥을 먹고 살았다. 때로는 상태가 나쁘기도 하고 좋기도 하고, 텔레비전도 보고 사랑도 하고, 학교에서 수업을 받고, 그리고 반드시 이 집으로 돌아왔다. 그 평범한 반복을 되새겨보면, 거기에는 늘 따스하고 보슬보슬하고 깨끗한 모래 같은 무언가가 남아 있다.
아스라한 그 온기를 온몸으로 느끼며, 여행의 노곤함에 조금은 졸린 나는 오랜만의 행복을 황홀하도록 만끽했다.
여름이 온다. 이제 여름이 시작된다.
반드시 한 번은 지나쳐야 하고, 그러나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여름. 그런 것을 잘 알면서도 평소처럼 흘러가 버릴 시간은 여느 때보다 조금은 팽팽하고 서글프다. 그때 그 저녁, 방에 앉아 있는 우리들 모두는 그렇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마음 아프도록 잘 아는데, 그런데도 행복한 기분이었다.

74. 가끔, 신기한 밤이 있다.
공간이 약간 어긋난 듯하고, 모든 것이 한꺼번에 보이는 그런 밤이다. 잠은 오지 않고, 밤새 재깍거리는 괘종시계의 울림과 천장으로 새어드는 달빝은, 내 어린 시절과 마찬가지로 어둠을 지배한다. 밤은 영원하다. 그리고 옛날에는 밤이 훨씬 더 길었던 것 같다. 무슨 희미한 냄새가 난다. 그것은 아마도, 너무 희미해서 감미로운 이별의 냄새이리라.

94. 이렇게 비 내리는 날에는 과거와 미래가 공기에 소리 없이 녹아들어, 떠오르는 것이다.
순간 눈물이 한 방울, 책 위로 떨어진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넘쳐흐르는 눈물.
퍼뜩 귀에, 비가 토독토독 처마를 적시는 소리가 들리고, 나는 '대체 뭐지, 지금 이 눈물은' 하는 기분으로 눈물을 닦는다. 그러고는 금방 잊어버리고 책을 다시 읽는다.

121. 사랑이란, 깨달았을 때는 이미 빠져 있는 거야, 나이가 몇이든. 그러나, 끝이 보이는 사랑하고 끝이 안 보이는 사랑은 전혀 다르지. 그건 자기 자신이 제일 잘 알 수 있어. 끝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즉 더 발전할 수 있다는 뜻이야. 지금 우리 마누라를 처음 알았을 때, 갑자기 내 미래가 무안해지는 듯한 느낌이었어.

123. 지금까지는, 뭐가 어떻게 되든, 그러니까 상대방이 눈앞에서 울고불고 난리를 피워도, 아무리 좋아하는 남자가 손을 잡게 해달라느니 만지게 해달라느니 해도, 뭐랄까... 강 건너 불구경하는 느낌이었어요. 강 건너에 불이 났는데, 이쪽 어두운 강가에서 구경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에요. 언제 불이 꺼질지 뻔히 보이니까, 졸리고 따분했거든요. 그런 건 언젠가는 반드시 끝나니까요. 사람들은 연애에서 뭘 추구할까 하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이번에는 내가 그 안에 있다는 느낌이 들어요. 곁에 개가 있기 때문인지, 아니면 내가 이사를 하기 때문인지, 아무튼. 하지만 쿄이치는 달라요. 몇 번을 만나도 싫증이 나지 않고, 얼굴을 보면 손에 든 소프트 아이스크림을 발라주고 싶을 정도로, 좋아요.

141. 우리는 많은 것을 보면서 성장한다. 그리고 시시각각 변해 간다. 그런 사실을 다양한 형태로, 거듭 확인하면서 나아간다. 그래도 정지시켜 두고 싶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오늘 같은 밤이었다. 온 사방이, 더 이상 아무것도 필요 없을 정도로, 조그맣고 고요한 행복으로 충만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