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ursday, February 19, 2015

요시모토 바나나- 암리타: 2015. 2. 13

13. 같은 집에 오래도록 함께 있지 않으면, 설령 같은 핏줄이라도 그리운 풍경의 하나로 멀어져 간다.

53. 인간이, 지금 여기에 있는 확고부동한 덩어리가, 실은 물렁물렁 부드럽고, 무엇엔가 살짝 찔리거나 부딪히기만 해도 쉽사리 부서지고 마는 엉터리라는 걸 실감한 것은 최근의 일이다. 이렇듯 날달걀 같은 물체가 오늘도 무사히 제 기능을 완수하고 생활을 꾸리고, 내가 알고 있는 사람들, 사랑하는 사람들 모두가 오늘도 자신을 간단하게 부숴버릴 수 있는 무수한 도구를 다루면서도 무사히 하루를 넘기고 있다는 이 기적이여.. 하고 생각하기 시작했더니 도무지 생각이 멈추지를 않았다.
나는 물론 지금도 아는 사람이 죽을 때마다, 주위 사람들이 탄식하며 슬퍼하는 모습을 목격할 때마다, 이렇게 끔찍한 일이 이 세상에 있을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하는 반면, 그래도 지금까지 거기에 존재했다는 기적에 비한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인지도.. 하고 생각한다. 그러면 살아 있으면서도 거의 정지해 버린 기분이 들곤 한다.
우주며 친구며, 친구의 부모, 또 그 사람의 친구가 사랑하는 사람들. 무한한 수에, 무한한 삶과 죽음. 소름이 오싹 끼치는 수치. 여기서 보고 있기로 하자, 한없이 영원에 가까운 그 수치를.

63. 더구나 나만의 나라는 것이 있었는지 없었는지조차 모르는 거니까요.

73. 왠지, 비 오는 날이면 어린 시절 같은 느낌 들지 않아?

75. 그 당시에는 죽고 싶을 정도로 따분한데, 나중에 되새겨보면 미치도록 사랑스런 것이다.
그리고 금방 떠올랐다. 여기에 있는 친구들과 같은 교실에 있었던 시절, 수업중에 졸았던 기억이다.
축사를 하고 있는 아저씨의 결코 흥미롭지 못한 내용의 얘기와 낮은 음성과, 그것이 높은 천장에 부딪혀 반향하는 울림이, 어느 오후의 수업을 떠오르게 한 것이다.
햇살이 스미는 밝은 교실에서 한참을 신나게 졸다가, 갑자기 눈을 뜰 때면 순간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 건지 알지 못한다. 아까 가물가물하게 멀어져 갔던 선생님의 음성이 똑같은 음량으로 계속되고 있다는 걸 깨닫는다. 그 이외에는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는다. 그 무음을 즐기고 있음을, 새삼스레 표시하고 있는 집단 같았다. 마른 나무 냄새, 눈부시게 쏟아지는 햇빛. 창밖으로는 푸르른 나무숲. 여기에 있는 사람들, 같은 나이의 사이좋은 사람들. 쉬는 시간이 되면 일제히 요동하기 시작하는 공기. 필통에 반사된 빛이 천장에서 춤추고, 이제 10분 후면 울릴 종소리를 모두들 고대하고 있다. 이처럼 기적 같은 공유를, 이곳을 떠나게 되면 두 번 다시 가은 친구들과 나눌 수 없다. 이 공간에는 그런 모든 정보가, 아스라한 향기처럼 포함되어 있다. 그런 느낌, 가슴을 저미는 빛의 기억.

77. 죽은 자는, 산 자의 마음에 부드러운 그림자만 드리운다.
하지만 그 그림자는 본인이 아니니까, 옛날 일이라고는 하지만 훨씬 더 멀어진다. 이제는 보이지 않을 정도로 멀고 멀다. 손을 흔들고 있다. 웃고 있다. 하지만 잘 보이지 않는다.

88. 예쁜 테이블과 가느다란 은수저에, 레몬 향기가 아련하게 감도는 투명한 물.
에스프레소와 달콤한 케이크.

기억이 격렬하게 되살아났다.
기억하고 있다는 것조차 잊고 있었는데.
나는 옜날 일을 별로 기억하고 있지 않으니 어젯일이 어제의 감정을 동반하지 않는데, 먼먼 옛날 일이 이렇게 갑자기 눈앞으로 성큼 다가설 때가 있다. 그때의 공기며, 기분이며, 장면.
지금 막 일어나고 있는 일이라 여겨질 만큼 고동스럽게.
그 지나친 생생함에 정말이지 혼란스럽다.


Thursday, January 1, 2015

모리사와 아키오- 무지개 곶의 찻집: 2015. 1. 1

36. 하양과 검은색으로 이루어진 똑같은 커피잔도 범고래로 보이기도 하고, 판다로 보이기도 하니까... 틀림없이 이 세상의 모든 물체는 어떻게 보고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그 물체의 존재 의의까지 간단히 바꿔버릴 것이다. 그렇다면... 노조미와 내가 이제부터 걸어갈 미래도 마음가짐 하나로 바뀔 수 있지 않을까?

102. '즐거운가, 즐겁지 않은가?' 그런 판단 기준만으로 인생을 살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105. 망설여질 때 로큰롤처럼 살기로 하면 인생이 재미있어지지.
늘 자신을 설레게 하는 쪽으로 가는 거야.
다소 위험이 따르더라도 말이야. 사람이란 뜻밖에 잘 쓰러지지 않거든. 열심히 하기만 하면 절실히 필요할 때 반드시 주군가가 손을 내밀어주지.

253. 과거를 그리워할 수 있다는 건 너희 둘이 현재의 자기 자신을 충분히 소중히 여긴다는 뜻이란다.
과거를 그리워하는 건 자신이 살아온 여정을 받아들였다는 증거가 아닐까? 괴로웠던 일까지 포함하여 여태까지의 인생을 통째로 긍정하기 때문에 너희는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그 당시를 추억할 수 있는 거란다. 겹겹이 쌓아온 과거의 시간이 바로 지금의 너희니, 과거를 그리워한다는 것 자체가 자신을 긍정하고, 받아들이고, 소중히 여기고 있다는 뜻이라고 생각해.

생각해보면 나도 언제부터인가 자신의 '운명'이나 성장 환경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가족을 남기고 자살한 엄마에 대해서도, 지금은 원망하기는커녕 오히려 불쌍히 여길 여유까지 생겼다. 그 당시.. 밴드 맴버들과 꿈을 좇기 시작한 후로 내 인생은 확실히 바뀌었다. 불우하게 느껴졌던 소년 시절의 '운명'도 록으로 비약하기 위한 심적 계기로써 이용할 줄 알았고, 즐 따라다니던 정신적 고통도 음악 표현을 위한 거대한 에너지로 바꾸는 방법을 터득해갔다.

255. 내가 쌓아온 것을 소중히 여기고, 타인이 쌓아온 것도 소중하게 생각한다면.. 틀림없이 그 사람도 어른이 되어 있을 거야.

285. 가게를 나선 자매는 당장 고타로의 집이 있는 테라스로 달려갔다. 마리가 빨간색 리드 줄을 오른손에 붙잡고 왼손으로는 미호와 손을 맞잡았다. 그리고 곶의 남쪽을 향해 초원 위를 걷기 시작했다. 고타로도 즐거운 듯 꼬리를 흔들며 자매와 나란히 걷고 있다.
조금씩 따스한 색을 띠기 시작한 여름의 엷은 석양이, 멀어져가는 두 사람과 한 마리 개의 뒷모습을 부드럽게 감싼다. 밖은 어느샌가 '쓰르륵쓰르륵'하는 쓰르라미의 구슬픈 노래로 채워졌다.
나는 영화의 한 장면 같은 그 뒷모습에 넋을 잃은 채 가만히 창가에 서서 바라보고 있었다. 자매가 갑자기 이쪽을 돌아보고 크게 손을 흔든다. 나도 볼 옆으로 손을 올려 살짝 흔들어주었다.

에쿠니 가오리- 장미 비파 레몬: 2014. 12. 29

43. 따끈한 햇살 냄새가 난다. 만나고픈 친구를 만나러 가는 것조차 귀찮을 만큼 이 집은 푸근하다.

74. 고지마 사쿠라코는 모든 일이 시시껄렁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대학도, 가족도, 편집부에서 하는 아르바이트도, 일일이 나열하자면 끝이 없다. 하지만 일상의 그 시시껄렁함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오래전에 이미 포기했다. 그렇다면 모든 일을 빈틈없이 처리하는 것이 상책이다.

85. 만사에 목표가 있으면 방법도 생기니까 편하다고 생각한다. 회사가 어떤 곳인지 알고 싶다, 그곳에서 일해서 월급을 받고 싶단 생각에 바라던 아르바이트 자리를 구했던 것처럼, 갖고 싶고 원하는 것은 반드시 손에 넣는다. 그러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을 자신도 있고, 노력해서 안 될 만큼 무능하지도 않다고 생각한다.

97. 하루 중 저녁때가 가장 좋으면서도 가장 쓸쓸한 시간이다. 왠지 허전하고 불안해진다. 아이라도 있으면 또 다를지도 모르겠지만, 절대 싫다는 미즈누마 정도는 아니어도 도우코 역시 아이를 갖고 싶은 마음은 없다. 이유를 물으면 짐이 너무 버겁다고 대답하지만, 사실은 그저 귀찮을 뿐이다. 엄마란 인종이 되고 싶지 않은지도 모르겠다.
결국 나는 모든 것을 귀찮아하는 것이다.
사 온 것을 정리해서 냉장고에 집어넣은 도우코는 또 거실에 엎드려 그렇게 생각한다. 결국은 늘 이렇게 바닥에 볼을 대고 유리창 너머로 하늘만 바라본다.

116. 돌아오는 길에 슈퍼마켓에 들러 장까지 봐 온 덕분에 청소를 끝내자 한가로워졌다. 저녁때 검둥이와 산책을 하는 것외에는 이렇다 할 일이 없다. 소파에 누워 팔걸이에 다리를 올려놓고 천장을 본다. 눈을 감고 빗소리를 듣는다. 후드득 후드득 처마를 때리는 빗소리.
도우코는 한 손을 소파 아래로 축 늘어뜨리고 손가락으로 따스한 털을 헤젓듯이 검둥이를 쓰다듬는다. 눈을 뜨고 천장을 보고는 다시 감는다. 이 공간은 시간이 멈춰 있는 것 같다고 생각한다. 후덥지근해서 에어컨을 켰다.

193. 아야는 자신이 아직도 계단을 올라가는 아이에게 손을 빌려주는 엄마 같은 사람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느끼고는 놀랐다. 고개를 드니 하늘은 에쁜 파란색. 자기도 모르게 입을 벌린 아야의 입과 코와 눈꺼풀과 귀로 살랑살랑 바람이 불었다.

209. 시간이 멈춘 느낌인 것 같군요. 멈춰 있는 시간을 불현듯 발견한 느낌이랄까, 잊고 있었던 자신을 되찾은 느낌이랄까.
도우코는 가슴이 두근거려, 더는 마시고 싶지 않은 녹차를 한 모금 삼키고 진심으로 말했다.

224. 그 당돌한 태도에 사랑스러움을 느꼈지만, 츠치야는 자중했다. 이런 때는 우둔한 척하는 게 상책이다.

275. 도우코는 마룻바닥에 엎드려 볼을 대고 온 방을 적시는 색소폰 소리에 몸을 맡겼다. 예쁘게 꾸민 크리스마스트리 아래서. 왜일까, 이 사람이 내는 소리는 무언가를 적신다. 아무것도 와 닿지 않아야 할 장소에 와 닿는다. 자신이 지금도 여전히 외톨이란 기분이 든다. 야마기시는 물론 미즈누마와 곤도도, 아무도 자신에게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아주 고독하고, 그리고 안심이 되는 일이다.

370. 나이는 문제가 아니었다. 문제는 자신이 연애의 시작에 부수되는 절차, 사소하면서도 멋지고 행복한 절차 하나하나를, 어떻게 쌓아가고 끌어가야 하는지, 그 과정과 방법을 까맣게 잊어버렸다는 것이다.

384. 에쿠니 가오리 씨의 소설을 읽다 보면 때로 연애란 어딘지 모르게 죽음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자신이 자신이 아닌 무엇으로 변해가는 그 감각. 육체는 여기에 있는데 마음은 허공을 떠돌면서 어딘가 얼토당토않은 곳으로 가려한다. 아무도 막을 수 없다. 그리고 도저히 돌아갈 수도 없다. 그런 불안이 전신을 감싸 가끔은 공포마저 느낀다. 하지만 그것은 아주 감미로운 공포다.
아무튼 사랑과 연애는 언제든 사람의 혼을 빼앗아가는 것이라는 말을 하고 싶었다.
정말 연애란 불가사의하고 성가신 것이다.
기쁘고 즐겁고 행복하고, 세상 어느 누구에게나 친절해지니 내가 이렇게 좋은 사람이었나 하고 혼자 키득키득 웃는 순간이 있는가 하면, 애틋함과 슬픔과 분노에 머리칼을 쥐어뜯고, 질투와 증오에 휩싸이고, 세상의 행복한 것 모두를 미워하는 자신을 깨닫고는 입술을 깨물 때도 있다.
그런것 역시 하나의 작은 죽음이 아닐까 생각한다. 지금까지 지니고 있던 이성과 도덕성이 무너져, 자신이 대체 어떤 사람이었는지 갈피를 잡지 못한다. 하지만ㄷ 동시에 그것은 재생을 의미하기도 한다. 사랑을 하는 순간, 지금까지 몰랐던 자신이 반짝 눈을 뜨고 숨 쉬기 시작하니까.

386. 지금은 그렇게 살고 있지 않아도, 내 안에는 어쩌면 그렇게 살았을지도 모르는 많은 인생이 있고, 등장인물들이 앞서 그것을 찾아내서는 스르륵 내 안으로 들어와 있다. 그리고 나는 나중에야 그 인물이 나와 어느 면에서 일치한다는 것을 안다.
그러다 보면 누구는 옳고 누구는 그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소리 없이 드러난다. 모두가 옳기도 하고 모두가 그르기도 하다. 모두가 사랑스럽고 모두가 어리석다. 모두가 거짓말쟁이이고 모두가 웃음이 나올 정도로 정직하다.

388. 연애는 어느 한 점을 돌파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얼굴이든 목소리든 성격이든, 아무튼 한 점을 돌파하는데서 연애는 시작한다.
평균적으로, 두루두루, 대충, 그런 걸 생각하니까 연애를 못 하는 거지요.

390. 장미 비파 레몬은 어쩌면 결혼과 사랑이란 아름다고 이상적인 말 뒤에 가려진 여자들의 근원적인 고독을 얘기하는 소설이다.

Tuesday, December 2, 2014

요시모토 바나나- 하치의 마지막 연인: 2014. 12. 2

7. 살아 있음을 증오했던 것은 아닌데, 늘 꿈속처럼 생의 모든 장면이 멀고 뿌옇기만 했었다. 많은 것들을 아주 가깝게 느끼거나 부자연스럽게 멀리 느꼈다.
그 시절, 내가 속한 세계에서 내 귀가 알아들을 수 있고 색깔 있는 말을 하는 사람은, 안 지 얼마 안 된 하치뿐이었다.
하치랑 지내는 시간만이 유일하게, 내가 나 자신과 데이트할 수 있는 시간이기도 했다.

14. 아이들은 천국에서, 어느 엄마의 몸으로 들어갈까를 정한다는 얘기가 있다. 분홍빛, 뭉게구름 위에서 이루어진 천사의 결단이다.
그때부터 이미, 무언가가 결정되어 있는 것이다.
<불길한 일의 중심은 언제든 가정에 있다고 생각한다. 커튼은 엄마의 이미지입니다. 따스하게 감쌀 수도 있지만, 감싸 질식시킬 수도 있죠. 마찬가지로 엄마 역시 지켜줄 수도 있지만, 죽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

26. 그때부터 나는 말로 설명하지 않기로 하였다. 하염없이, 하염없이 설명하면 내 혈관으로 흐르는 피까지 알아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나의 안이함은, 실제 나이보다 늙어 보이는 내가 쓸쓸한 내 육체로부터 전 우주를 향하여 발산한 유일한 어린 마음이었다.
그때 나는 비로소 어른으로 홀로서기를 하였고, 내 혼과 사랑에 빠졌다.
단 한 순간이라도 자기 자신과 농밀한 사랑의 시간을 가질 수 있다면, 삶에 대한 증오는 사라진다.

27. 먹고 싶지 않을 때는 먹지 않고, 자고 싶지 않을 때는 자지 않는 것이 좋다. 시간은 부조리한 것, 노력한 만큼 되돌아온다는 보장은 없다. 그렇게 엉터리 같은 이 세계에서는 머리를 써서, 필요한 것만 생각하며 산다.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균형을 유지하면서 빛을 잃지 않도록 사는 거야. 그러면 거짓말 따위 접근하지 못한다.

37. 한여름의 녹음으로 무성한 길을, 잰 걸음으로 걸었다. 오래오래, 숨이 차오를 정도로, 둘이서 걷는다는 기쁨에 어질어질 현기증을 느끼면서.

39. 느닷없이, 나느 언제나 보고 있을 뿐, 이란 생각이 들었다. 보고 있을 뿐, 거기에 나 자신은 없다.

44. 진짜로 거짓말을 한 것보다 더 나쁜 것은, 자기 생각으로 타인을 움직이려 하는 것이다. 설사 좋은 뜻으로 하는 일이라도, 그리고 아무리 가볍거나 무거워도, 죄임에는 틀림이 없다. 타인의 생각이 어느 틈엔가 자기 사정에 맞게 바뀌도록 압력을 가하다니, 끔찍한 일이다.

59. 몸을 맡긴다 함은, 우선 바짝 긴장을 하고, 숨을 조이고, 그러고서 풀어냄을 뜻하는 것이었나보다.
의식하지 않으면 않을수록 그림이 잘 그려졌다.
그리하여 나는 그림을 그리는 일과, 나 자신과, 친구가 될 수 있었다. 이게 기본이었다.

63. 나는 여자 역시, 결국은 <항상 같이 있어주는 사람>을 좋아한다고 생각한다. 시장을 보러 갈 때나, 카페에서 커피를 마실 때나, 파티에 참석할 때나, 어디든.

65. 기간이 정해져 있으면, 그런 일들을 쉬 알 수 있다. 부자유스러움의 얼개를. 그리고 매사 물러날 때를 포착하는 것이 얼마나 생명을 활기 차게 해주는지를.
지금 이 영원한 상자 정원을 무너뜨릴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우리한테는 밤도 낮도 의무도 없고, 내일을 위해 지키지 않으면 안 될 약속도 없었다.
모두가 우리처럼만 살고 있다면, 얼마나.
상대방을 잘 알 수 있을 텐데. 자기 자신을 잘 알 수 있을 텐데. 친절할 수 있을 텐데.

66. 한번 안 되면, 안 된다는 생각이 눌러붙어서, 떼내기가 힘드니까, 처음 할 때의 집중이 중요해. 그리고 물론 거기에는 요령도 있지만, 말로 하면 할수록 멀어지니까, 그리고 줄어드니까, 깨달은 사람이 이러니저러니 말하지 않는 것은, 말할 수 없어서가 아니라 말하면 줄어든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야.

80. 하치는 두고두고 후회하지 않도록, 서슴없이 감정을 발산하였다. 지금의 슬픔을 지금으로 끝내기 위한, 산 테크닉이었다.

101. 모든 것이 변하는 시기가 있는 거야. 모든 일에는, 변하는, 때와 장소가 있어. 좋든 나쁘든.

123. 정말 마음에 든 사람끼리는 언제나 이런 식으로 술래잡기를 한다. 타이밍은 영원히 맞지 않는다.

124. 빛이 두 사람의 무릎에서 넘실거린다. 앞쪽에서 할머니가 끄덕끄덕 졸고 있다. 운전사 앞에는 가족 사진이 붙어 있다. 길가에 있는 수많은 여관에 한가로운 오후가 찾아들고 있다. 나무들이 빛을 품고 흔들리고 있다. 바람, 시원한, 최고의 바람.
버스가 흔들리고 있다. 빛이, 춤추고 있다.
아무쪼록 그것만으로, 이대로.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여름의, 기적의 포옹을.
둘만이서, 단둘이서.

139. 실연했는데 억지로 기운 내려 애쓰는 것은, 미처 익지도 않아 시퍼런 바나나를 레인지에 넣어 노랗게 만들려는 것이다.

145. 운명처럼 마오의 닫힌 세계의 문을 살며시 열고 나타난 하치는, 세계로 통하는 다리를 놓아주고, 그녀의 손을 잡아 알록달록 채색된 세상으로 조심조심, 소리없이 인도한다.
별하늘과 교류하고 인류의 평화를 기원하는 하치가 만들어놓은 여유롭고 자연스런 열린 공간에서, 마오는 자기 내면에 갇혀 있던 표현이 욕구를 해방시키고, 죽어 있던 시간에 회생의 숨을 불어넣는다.
이 작품에서 사랑이란 그렇게 가능한다.
자기 자신 안에 갇혀 있는 마오에게 세상으로 이어지는 다리를 놓아주고, 자기만의 언어를 깨닫게 하고, 그리고 그 존재의 기억으로 삶의 바다에 노저어 나갈 수 있게 하는 힘으로 말이다.

무레 요코- 빵과 수프, 고양이와 함께 하기 좋은 날: 2014. 12. 1

23. 선생님은 다시마로 국물을 낼 대는 물이 펄펄 끓기 전에 반드시 다시마를 건져내야 한다고 했다. 물이 끓으면서 다시마가 살랑살랑 움직이기 시작할 때라고 알기 쉽게 그 타이밍을 가르쳐주었다.

58. 가장 중요한 점은 자신의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것이다. 사람들은 금방 싫증을 낸다. 오늘은 우리 가게를 찾아주었지만 날로 바뀌는 유행을 좇아 내일은 그냥 지나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건 또 그때 생각할 문제다.

64. 아키코는 엄마를 포함해 다른 사람과 비교되는 것에 연연하지 않고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할 뿐이었다.

65. 시마 씨는 외모가 세련되거나 현대적인 분위기는 아니지만, 센스가 있는 데다 생각도 반듯하고 무엇보다 일을 잘했다. 그렇다고 일 잘하는 아르바이트생이 흔히 그렇듯, 자신이 경영자라도 된 것처럼 착각하고 말참견을 하는 일도 없었다. 과연 운동으로 단련된 사람답게 자신의 처지를 잘 파악하고, 자기가 해야 할 일과 하지 않아도 좋을 일을 분별할 줄 알았다.

70. 애당초 남이 만든 음식을 가지고 뭐라도 된 것처럼 맛이 있네 없네, 하며 평가하는 것 자체가 잘못된 거죠. 맛있는 가게를 알아보는 안목이 있으면 그만인 일인데.

116. 아키코는 가게 일을 하지 않고,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이 순간이 행복했다. 젊었을 때는 생일이나 크리스마스에 케이크를 먹거나 선물을 받는 이벤트가 즐거웠다. 하지만 나이를 이렇게 먹고 보니 일상 속의 소소한 부분에서 행복을 느끼게 됐다. 아키코는 작은 일에 행복을 느끼는 자신에게 만족하면서 머리에 따스한 햇살을 받으며 꼬박꼬박 졸고 있는 타로를 바라 보았다.

222. 시간이 슬픔을 해결해준다는 말은 거짓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더 깊어지는 슬픔도 있다. 그렇다고 그 슬픔을 잊기 위해 다른 고양이를 키울 마음은 없었다.

228. 울고 싶을 때는 마음껏 우는 것도 좋아요. 몸에서 나오고 싶어 하는 것은 내보내는 게 좋거든요.

요시모토 바나나- 아르헨티나 할머니: 2014. 11. 30

12. 외동딸인 내가 엄마의 죽음을 경험하면서 무엇을 얻었는지는 뭐라 정확하게 표현할 수 없다. 하지만 내 눈동자에 늘 깃든 어떤 빛으로 표현할 수 있다. 거울을 보면 내 눈에 전에는 없던, 무언가를 받아들이는 커다란 힘이 깃들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커다란 선물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과, 이가 덜덜 떨리는 공포와, 평생 뇌리에서 떠나지 않을 병원 복도의 어두운 풍경을 본 대가로.
엄마의 몸에서 엄마의 혼이 떠났을 때, 나는 그 싸늘한 몸을 보면서 몇 번이나 생각했다.
'아아, 엄마는 이걸 타고 여행을 했던 거야.'
그래서 나 역시 내 몸을, 자동차를 꼼꼼히 정비하듯 소중히 다루게 되었다. 기름이 하이옥탄인지 레귤러인지, 산길에 강한지, 눈이 내리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어떤 페인트로 도장을 하면 좋은지, 연비가 떨어지는 음식은 무엇이고 어떤 부담을 주는지. 내 몸을 자동차라고 생각하자 이해하기가 쉬웠다. 그리고 나는 예전보다 오히려 건강해졌다.

20. 왜 사람은 그런 상상이나 생각을 품게 되는 것일까? 사실은 병의 증세에 따라, 가족의 입장은 그때그때 얼마든지 달라지는데.
아마도 사랑하는 사람의 변화가 두려워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리라.

23. 사람은 죽는 순간까지 살아 있다. 절대 마음속에서 미리 묻어서는 안 된다.

31. 엄마가 살아 있을 때는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다. 한없이 자유롭다는 느낌과 앞만 보고 달리지 않으면 망가져 버릴 듯한 고독이 한꺼번에 내 것이 되었다. 그런데도 겉으로 드러난 것보다는 좋은 일인 듯한 기분이 들었다.

36. 겨울 하늘과 삼 층짜리 낡은 건물과, 울창한 숲 같은 정원, 메마른 식물의 달큰한 냄새와 톡 쏘는 고양이 오줌 냄새가 섞인 겨울 공기가 이곳에서만 결계 같은 역할을 하면서 싸늘하게 빛나고, 살아 있는 느낌이 들었다.
새소리가 마치 노랫소리처럼, 피리 소리처럼 드높게 울려 퍼진다.
저 너머의 먼 세계에, 내가 살아가는 일상이 있다. 자동차가 달리고, 집들이 있고, 대형 슈퍼마켓이 있고, 나날의 잡다함이 있고, 시끌시끌함이 있는 세계가.
아아, 고요하다. 발을 들여놓고 보니, 모든 것이 아주 평화롭다.

47. 인생의 톱니바퀴가 하나만 어긋났어도, 어쩌면 파리 같은 곳에서 이런 분위기의 여자와 함께 이런 생활을 했을지도 모른다.

49. 그림움이란, 모든 것이 달라진 후에야 비로소 싹트는 것, 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61. 아르헨티나 빌딩 안에서는 시간이 사람의 머릿속 힘으로 완전히 멈춰져 있으니까, 시간이 특별하게 흐르는 그곳에서는 과거와 현재의 나뉨이 없어서 그런 꿈도 꿀 수 있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75. 정말 아름다운 여자는, 보고 또 봐더 어떤 얼굴인지 기억할 수 없는 법이지.

77. 나는 유리 씨가 한 줌도 안 되는 아빠의 돈을 노리고 있다고 생각했던 나 자신이 너무도 부끄러웠다. 그렇게 부끄러운 일이란, 생각만 했어도 언젠가는 자신에게 되돌아온다는 것도 알았다.

79. 그 무렵 유리 씨는 낡고 어두운 집 속으로, 그 칙칙한 바탕색 속으로 조금씩 녹아드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아기만 유독 색깔을 띠고 도드라졌다. 바로 그것이 생명의 자연스러운 모습이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 배경에 점차 녹아들듯이 죽어 가는 삶이 옳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한다.

84. 한없이 먼 이국을 여행하는 것이나 자기만의 유적을 만드는 것이나 그 시도의 근원은 같다고 생각한다. 어떤 시대에서 어떤 시대로 여행을 하고, 끝내는 사라진다. 영원 속에 소박한 저항을 새기는 것, 그뿐이다.

87. 사람이 왜 유적을 만드는지 알아?
좋아하는 사람이 영원히 죽지 않고, 영원히 오늘이 계속되었으면 좋겠다고, 그렇게 생각해서일 거야.
그건 인간이 영원토록 지니는 허망한 바람인 거야. 그리고 위에서 보면 목걸이처럼 반짝반짝 빛나는, 신마저 부러워 매혹당하는 아름다운 빛의 알갱이지, 라고 유리씨는 말했다.

Sunday, November 9, 2014

노희경: 지금 사랑하지 않는 자, 모두 유죄: 2014. 11. 8

8. 어차피 지금 쓴 글들도 시간이 가면 지금처럼 낯간지러울 게 뻔하다. 나이가 들어가며 좋은 게 있다. 험한 말로는 뻔뻔스러움이요, 조금 포장을 하면 어떤 성과도 과오도 시간이 가면 다 별거가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되는 것이다.

14. 그런데, 어느 날 문득 드는 생각.
너, 그리 살어 정말 행복하느냐?
나는 행복하지 않았다.
죽도록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에 살 만큼만 사랑했고,
영원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언제나 당장 끝이 났다.
내가 미치도록 그리워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도 나를 미치게 보고 싶어 하지 않았고,
그래서, 나는 행복하지 않았다.

사랑은 내가 먼저 다 주지 않으면 아무것도 주지 않았다.
버리지 않으면 채워지지 않는 물잔과 같았다.

내가 아는 한 여자.
그 여잔 매번 사랑할 때마다 목숨을 걸었다.
처음엔 자신의 시간을 온통 그에게 내어주고,
그 다음엔 웃음을 미래를 몸을 정신을 주었다.
나는 무모하다 생각했다.
그녀가 그렇게 모든 걸 내어주고 어찌 버틸까, 염려스러웠다.
그런데, 그렇게 저를 다 주고도 그녀는 쓰러지지 않고,
오늘도 해맑게 웃으며 연애를 한다.
나보다 충만하게.

그리고 내게 하는 말.
나를 버리니, 그가 오더라.
그녀는 자신을 버리고 사랑을 얻었는데,
나는 나를 지키느라 나이만 먹었다.

사랑하지 않는 자는 모두 유죄다.

자신에게 사랑받을 대상 하나를 유기했으니
변명의 여지가 없다.
속죄하는 기분으로 이번 겨울도 난 감옥 같은 방에 갇혀,
반성문 같은 글이나 쓰련다.

42. 인생을 살면서 절대 잊혀질 것 같지 않은 장면들이 잊혀지고, 절대 용서될 것 같지 않은 일들이 용서되면서 우리는 여자로 혹은 남자로 성장한다. 누구는 그러한 성장을 성숙이라고도 하고 타락이라고도 말한다. 그러나 나는 다만 과정이라고 말하고 싶다.

49. 서로가 서로에게 강자이거나 약자라고 생각할 때,
사랑의 설레임은 물론 사랑마저 끝이 난다.
이 세상에 권력의 구조가 끼어들지 않는 순수한 관계가 과연 존재할 수 있을까?
설레임이 설레임으로만 오래도록 남아 있는
그런 관계가 과연 있기는 한 걸까?
아직은 모를 일이다.

56. '당신을 이해할 수 없어.'
이 말은 엊그제까지만 해도 내게 상당히 부정적인 의미였는데, 절대 이해할 수 없는 준영일 안고 있는 지금은 그 말이 참 매력적이란 생각이 든다.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린 더 이야기할 수 있고,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린 지금 몸 안의 온 감각을 곤두세워야만 한다.

이해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건 아니구나.

또 하나 배워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