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esday, December 2, 2014

요시모토 바나나- 하치의 마지막 연인: 2014. 12. 2

7. 살아 있음을 증오했던 것은 아닌데, 늘 꿈속처럼 생의 모든 장면이 멀고 뿌옇기만 했었다. 많은 것들을 아주 가깝게 느끼거나 부자연스럽게 멀리 느꼈다.
그 시절, 내가 속한 세계에서 내 귀가 알아들을 수 있고 색깔 있는 말을 하는 사람은, 안 지 얼마 안 된 하치뿐이었다.
하치랑 지내는 시간만이 유일하게, 내가 나 자신과 데이트할 수 있는 시간이기도 했다.

14. 아이들은 천국에서, 어느 엄마의 몸으로 들어갈까를 정한다는 얘기가 있다. 분홍빛, 뭉게구름 위에서 이루어진 천사의 결단이다.
그때부터 이미, 무언가가 결정되어 있는 것이다.
<불길한 일의 중심은 언제든 가정에 있다고 생각한다. 커튼은 엄마의 이미지입니다. 따스하게 감쌀 수도 있지만, 감싸 질식시킬 수도 있죠. 마찬가지로 엄마 역시 지켜줄 수도 있지만, 죽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

26. 그때부터 나는 말로 설명하지 않기로 하였다. 하염없이, 하염없이 설명하면 내 혈관으로 흐르는 피까지 알아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나의 안이함은, 실제 나이보다 늙어 보이는 내가 쓸쓸한 내 육체로부터 전 우주를 향하여 발산한 유일한 어린 마음이었다.
그때 나는 비로소 어른으로 홀로서기를 하였고, 내 혼과 사랑에 빠졌다.
단 한 순간이라도 자기 자신과 농밀한 사랑의 시간을 가질 수 있다면, 삶에 대한 증오는 사라진다.

27. 먹고 싶지 않을 때는 먹지 않고, 자고 싶지 않을 때는 자지 않는 것이 좋다. 시간은 부조리한 것, 노력한 만큼 되돌아온다는 보장은 없다. 그렇게 엉터리 같은 이 세계에서는 머리를 써서, 필요한 것만 생각하며 산다.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균형을 유지하면서 빛을 잃지 않도록 사는 거야. 그러면 거짓말 따위 접근하지 못한다.

37. 한여름의 녹음으로 무성한 길을, 잰 걸음으로 걸었다. 오래오래, 숨이 차오를 정도로, 둘이서 걷는다는 기쁨에 어질어질 현기증을 느끼면서.

39. 느닷없이, 나느 언제나 보고 있을 뿐, 이란 생각이 들었다. 보고 있을 뿐, 거기에 나 자신은 없다.

44. 진짜로 거짓말을 한 것보다 더 나쁜 것은, 자기 생각으로 타인을 움직이려 하는 것이다. 설사 좋은 뜻으로 하는 일이라도, 그리고 아무리 가볍거나 무거워도, 죄임에는 틀림이 없다. 타인의 생각이 어느 틈엔가 자기 사정에 맞게 바뀌도록 압력을 가하다니, 끔찍한 일이다.

59. 몸을 맡긴다 함은, 우선 바짝 긴장을 하고, 숨을 조이고, 그러고서 풀어냄을 뜻하는 것이었나보다.
의식하지 않으면 않을수록 그림이 잘 그려졌다.
그리하여 나는 그림을 그리는 일과, 나 자신과, 친구가 될 수 있었다. 이게 기본이었다.

63. 나는 여자 역시, 결국은 <항상 같이 있어주는 사람>을 좋아한다고 생각한다. 시장을 보러 갈 때나, 카페에서 커피를 마실 때나, 파티에 참석할 때나, 어디든.

65. 기간이 정해져 있으면, 그런 일들을 쉬 알 수 있다. 부자유스러움의 얼개를. 그리고 매사 물러날 때를 포착하는 것이 얼마나 생명을 활기 차게 해주는지를.
지금 이 영원한 상자 정원을 무너뜨릴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우리한테는 밤도 낮도 의무도 없고, 내일을 위해 지키지 않으면 안 될 약속도 없었다.
모두가 우리처럼만 살고 있다면, 얼마나.
상대방을 잘 알 수 있을 텐데. 자기 자신을 잘 알 수 있을 텐데. 친절할 수 있을 텐데.

66. 한번 안 되면, 안 된다는 생각이 눌러붙어서, 떼내기가 힘드니까, 처음 할 때의 집중이 중요해. 그리고 물론 거기에는 요령도 있지만, 말로 하면 할수록 멀어지니까, 그리고 줄어드니까, 깨달은 사람이 이러니저러니 말하지 않는 것은, 말할 수 없어서가 아니라 말하면 줄어든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야.

80. 하치는 두고두고 후회하지 않도록, 서슴없이 감정을 발산하였다. 지금의 슬픔을 지금으로 끝내기 위한, 산 테크닉이었다.

101. 모든 것이 변하는 시기가 있는 거야. 모든 일에는, 변하는, 때와 장소가 있어. 좋든 나쁘든.

123. 정말 마음에 든 사람끼리는 언제나 이런 식으로 술래잡기를 한다. 타이밍은 영원히 맞지 않는다.

124. 빛이 두 사람의 무릎에서 넘실거린다. 앞쪽에서 할머니가 끄덕끄덕 졸고 있다. 운전사 앞에는 가족 사진이 붙어 있다. 길가에 있는 수많은 여관에 한가로운 오후가 찾아들고 있다. 나무들이 빛을 품고 흔들리고 있다. 바람, 시원한, 최고의 바람.
버스가 흔들리고 있다. 빛이, 춤추고 있다.
아무쪼록 그것만으로, 이대로.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여름의, 기적의 포옹을.
둘만이서, 단둘이서.

139. 실연했는데 억지로 기운 내려 애쓰는 것은, 미처 익지도 않아 시퍼런 바나나를 레인지에 넣어 노랗게 만들려는 것이다.

145. 운명처럼 마오의 닫힌 세계의 문을 살며시 열고 나타난 하치는, 세계로 통하는 다리를 놓아주고, 그녀의 손을 잡아 알록달록 채색된 세상으로 조심조심, 소리없이 인도한다.
별하늘과 교류하고 인류의 평화를 기원하는 하치가 만들어놓은 여유롭고 자연스런 열린 공간에서, 마오는 자기 내면에 갇혀 있던 표현이 욕구를 해방시키고, 죽어 있던 시간에 회생의 숨을 불어넣는다.
이 작품에서 사랑이란 그렇게 가능한다.
자기 자신 안에 갇혀 있는 마오에게 세상으로 이어지는 다리를 놓아주고, 자기만의 언어를 깨닫게 하고, 그리고 그 존재의 기억으로 삶의 바다에 노저어 나갈 수 있게 하는 힘으로 말이다.

무레 요코- 빵과 수프, 고양이와 함께 하기 좋은 날: 2014. 12. 1

23. 선생님은 다시마로 국물을 낼 대는 물이 펄펄 끓기 전에 반드시 다시마를 건져내야 한다고 했다. 물이 끓으면서 다시마가 살랑살랑 움직이기 시작할 때라고 알기 쉽게 그 타이밍을 가르쳐주었다.

58. 가장 중요한 점은 자신의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것이다. 사람들은 금방 싫증을 낸다. 오늘은 우리 가게를 찾아주었지만 날로 바뀌는 유행을 좇아 내일은 그냥 지나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건 또 그때 생각할 문제다.

64. 아키코는 엄마를 포함해 다른 사람과 비교되는 것에 연연하지 않고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할 뿐이었다.

65. 시마 씨는 외모가 세련되거나 현대적인 분위기는 아니지만, 센스가 있는 데다 생각도 반듯하고 무엇보다 일을 잘했다. 그렇다고 일 잘하는 아르바이트생이 흔히 그렇듯, 자신이 경영자라도 된 것처럼 착각하고 말참견을 하는 일도 없었다. 과연 운동으로 단련된 사람답게 자신의 처지를 잘 파악하고, 자기가 해야 할 일과 하지 않아도 좋을 일을 분별할 줄 알았다.

70. 애당초 남이 만든 음식을 가지고 뭐라도 된 것처럼 맛이 있네 없네, 하며 평가하는 것 자체가 잘못된 거죠. 맛있는 가게를 알아보는 안목이 있으면 그만인 일인데.

116. 아키코는 가게 일을 하지 않고,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이 순간이 행복했다. 젊었을 때는 생일이나 크리스마스에 케이크를 먹거나 선물을 받는 이벤트가 즐거웠다. 하지만 나이를 이렇게 먹고 보니 일상 속의 소소한 부분에서 행복을 느끼게 됐다. 아키코는 작은 일에 행복을 느끼는 자신에게 만족하면서 머리에 따스한 햇살을 받으며 꼬박꼬박 졸고 있는 타로를 바라 보았다.

222. 시간이 슬픔을 해결해준다는 말은 거짓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더 깊어지는 슬픔도 있다. 그렇다고 그 슬픔을 잊기 위해 다른 고양이를 키울 마음은 없었다.

228. 울고 싶을 때는 마음껏 우는 것도 좋아요. 몸에서 나오고 싶어 하는 것은 내보내는 게 좋거든요.

요시모토 바나나- 아르헨티나 할머니: 2014. 11. 30

12. 외동딸인 내가 엄마의 죽음을 경험하면서 무엇을 얻었는지는 뭐라 정확하게 표현할 수 없다. 하지만 내 눈동자에 늘 깃든 어떤 빛으로 표현할 수 있다. 거울을 보면 내 눈에 전에는 없던, 무언가를 받아들이는 커다란 힘이 깃들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커다란 선물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과, 이가 덜덜 떨리는 공포와, 평생 뇌리에서 떠나지 않을 병원 복도의 어두운 풍경을 본 대가로.
엄마의 몸에서 엄마의 혼이 떠났을 때, 나는 그 싸늘한 몸을 보면서 몇 번이나 생각했다.
'아아, 엄마는 이걸 타고 여행을 했던 거야.'
그래서 나 역시 내 몸을, 자동차를 꼼꼼히 정비하듯 소중히 다루게 되었다. 기름이 하이옥탄인지 레귤러인지, 산길에 강한지, 눈이 내리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어떤 페인트로 도장을 하면 좋은지, 연비가 떨어지는 음식은 무엇이고 어떤 부담을 주는지. 내 몸을 자동차라고 생각하자 이해하기가 쉬웠다. 그리고 나는 예전보다 오히려 건강해졌다.

20. 왜 사람은 그런 상상이나 생각을 품게 되는 것일까? 사실은 병의 증세에 따라, 가족의 입장은 그때그때 얼마든지 달라지는데.
아마도 사랑하는 사람의 변화가 두려워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리라.

23. 사람은 죽는 순간까지 살아 있다. 절대 마음속에서 미리 묻어서는 안 된다.

31. 엄마가 살아 있을 때는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다. 한없이 자유롭다는 느낌과 앞만 보고 달리지 않으면 망가져 버릴 듯한 고독이 한꺼번에 내 것이 되었다. 그런데도 겉으로 드러난 것보다는 좋은 일인 듯한 기분이 들었다.

36. 겨울 하늘과 삼 층짜리 낡은 건물과, 울창한 숲 같은 정원, 메마른 식물의 달큰한 냄새와 톡 쏘는 고양이 오줌 냄새가 섞인 겨울 공기가 이곳에서만 결계 같은 역할을 하면서 싸늘하게 빛나고, 살아 있는 느낌이 들었다.
새소리가 마치 노랫소리처럼, 피리 소리처럼 드높게 울려 퍼진다.
저 너머의 먼 세계에, 내가 살아가는 일상이 있다. 자동차가 달리고, 집들이 있고, 대형 슈퍼마켓이 있고, 나날의 잡다함이 있고, 시끌시끌함이 있는 세계가.
아아, 고요하다. 발을 들여놓고 보니, 모든 것이 아주 평화롭다.

47. 인생의 톱니바퀴가 하나만 어긋났어도, 어쩌면 파리 같은 곳에서 이런 분위기의 여자와 함께 이런 생활을 했을지도 모른다.

49. 그림움이란, 모든 것이 달라진 후에야 비로소 싹트는 것, 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61. 아르헨티나 빌딩 안에서는 시간이 사람의 머릿속 힘으로 완전히 멈춰져 있으니까, 시간이 특별하게 흐르는 그곳에서는 과거와 현재의 나뉨이 없어서 그런 꿈도 꿀 수 있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75. 정말 아름다운 여자는, 보고 또 봐더 어떤 얼굴인지 기억할 수 없는 법이지.

77. 나는 유리 씨가 한 줌도 안 되는 아빠의 돈을 노리고 있다고 생각했던 나 자신이 너무도 부끄러웠다. 그렇게 부끄러운 일이란, 생각만 했어도 언젠가는 자신에게 되돌아온다는 것도 알았다.

79. 그 무렵 유리 씨는 낡고 어두운 집 속으로, 그 칙칙한 바탕색 속으로 조금씩 녹아드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아기만 유독 색깔을 띠고 도드라졌다. 바로 그것이 생명의 자연스러운 모습이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 배경에 점차 녹아들듯이 죽어 가는 삶이 옳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한다.

84. 한없이 먼 이국을 여행하는 것이나 자기만의 유적을 만드는 것이나 그 시도의 근원은 같다고 생각한다. 어떤 시대에서 어떤 시대로 여행을 하고, 끝내는 사라진다. 영원 속에 소박한 저항을 새기는 것, 그뿐이다.

87. 사람이 왜 유적을 만드는지 알아?
좋아하는 사람이 영원히 죽지 않고, 영원히 오늘이 계속되었으면 좋겠다고, 그렇게 생각해서일 거야.
그건 인간이 영원토록 지니는 허망한 바람인 거야. 그리고 위에서 보면 목걸이처럼 반짝반짝 빛나는, 신마저 부러워 매혹당하는 아름다운 빛의 알갱이지, 라고 유리씨는 말했다.

Sunday, November 9, 2014

노희경: 지금 사랑하지 않는 자, 모두 유죄: 2014. 11. 8

8. 어차피 지금 쓴 글들도 시간이 가면 지금처럼 낯간지러울 게 뻔하다. 나이가 들어가며 좋은 게 있다. 험한 말로는 뻔뻔스러움이요, 조금 포장을 하면 어떤 성과도 과오도 시간이 가면 다 별거가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되는 것이다.

14. 그런데, 어느 날 문득 드는 생각.
너, 그리 살어 정말 행복하느냐?
나는 행복하지 않았다.
죽도록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에 살 만큼만 사랑했고,
영원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언제나 당장 끝이 났다.
내가 미치도록 그리워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도 나를 미치게 보고 싶어 하지 않았고,
그래서, 나는 행복하지 않았다.

사랑은 내가 먼저 다 주지 않으면 아무것도 주지 않았다.
버리지 않으면 채워지지 않는 물잔과 같았다.

내가 아는 한 여자.
그 여잔 매번 사랑할 때마다 목숨을 걸었다.
처음엔 자신의 시간을 온통 그에게 내어주고,
그 다음엔 웃음을 미래를 몸을 정신을 주었다.
나는 무모하다 생각했다.
그녀가 그렇게 모든 걸 내어주고 어찌 버틸까, 염려스러웠다.
그런데, 그렇게 저를 다 주고도 그녀는 쓰러지지 않고,
오늘도 해맑게 웃으며 연애를 한다.
나보다 충만하게.

그리고 내게 하는 말.
나를 버리니, 그가 오더라.
그녀는 자신을 버리고 사랑을 얻었는데,
나는 나를 지키느라 나이만 먹었다.

사랑하지 않는 자는 모두 유죄다.

자신에게 사랑받을 대상 하나를 유기했으니
변명의 여지가 없다.
속죄하는 기분으로 이번 겨울도 난 감옥 같은 방에 갇혀,
반성문 같은 글이나 쓰련다.

42. 인생을 살면서 절대 잊혀질 것 같지 않은 장면들이 잊혀지고, 절대 용서될 것 같지 않은 일들이 용서되면서 우리는 여자로 혹은 남자로 성장한다. 누구는 그러한 성장을 성숙이라고도 하고 타락이라고도 말한다. 그러나 나는 다만 과정이라고 말하고 싶다.

49. 서로가 서로에게 강자이거나 약자라고 생각할 때,
사랑의 설레임은 물론 사랑마저 끝이 난다.
이 세상에 권력의 구조가 끼어들지 않는 순수한 관계가 과연 존재할 수 있을까?
설레임이 설레임으로만 오래도록 남아 있는
그런 관계가 과연 있기는 한 걸까?
아직은 모를 일이다.

56. '당신을 이해할 수 없어.'
이 말은 엊그제까지만 해도 내게 상당히 부정적인 의미였는데, 절대 이해할 수 없는 준영일 안고 있는 지금은 그 말이 참 매력적이란 생각이 든다.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린 더 이야기할 수 있고,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린 지금 몸 안의 온 감각을 곤두세워야만 한다.

이해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건 아니구나.

또 하나 배워간다.

Friday, October 31, 2014

요시모토 바나나- N. P.: 2014. 10. 31

26. 얼음주머니로 반은 가려진 시야, 고개를 움직여 창 밖을 보니 저녁 노을이었다. 핑크 빛 구름이 선명한 층을 이루며 저 너머 서편으로 이어져 있다. 순간, 열에 들뜬 머리로, 뭐가 현실에서 일어난 일인지 알 수 없게 되었다.
아버지가 집을 떠나, 이제는 다른 곳에서 가정을 꾸리고 있다는 것. 매일 밤 영어 공부를 한다는 것. 함박눈이 내려 교정이 온통 순백색으로 뒤덮였었다는 것.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이미 열 기운에, 가로등 불빛이 뽀얗게 보였다는 것.

28. 그날은 비가 내려, 학교에서 돌아온 언니와 나는 둘이서 전기난로를 사이에 두고 엄마가 돌아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드러누워, 잡지를 읽는 언니 쪽을 망연히 바라보고 있었다. 언니는, 팔락팔락 하고 물방울이 떨어지듯 일정한 간격으로 페이지를 넘겼다. 옆집에서 울리는 TV 소리가 빗소리에 섞여 들려왔다. 창문은 김으로 뽀얗고, 방은 더울 정도로 따뜻했다.

103. 이따금 상태가 안 좋을 때에 생각한다. 만약 부모가 헤어지지 않았더라면, 만약 독신생활이 이렇게 장기화하지 않았더라면, 만약에 그때에 언어에 눈뜨지 않았더라면, 쇼지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런 얽힘이 없었더라면, 나는 본래의 나였을까? 자유로운?

145. 흘러가는 시간을 뼛속 깊이 사랑스럽게 느낀다.

149. 옜날, 사람과 사람의 관계는 이렇지가 않았는데 말이지. 모두들 언제라도 한가하고 상냥했었어.

그렇다면 그녀의 매력은 무엇일까?
저 어딘가 색다른, 자립해 있는 재능의, 자기 충족적인 무언가. 타자와는 결코 나눌 수 없는. 그녀 자신만의 내면의 고뇌 같은 것. 몇 사람에게만 통하는 강력한 신호.

236. 스이가 어째서 살아 남으려고 했는가. 그런 까닭 따위 아무도 모른다. 살아 남아야만 하다고 느끼게 하는 것, 어째서 사는가? 그런 질문 따위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하게 하는 것, 삶과 죽음에 대해 생각하기를 멈추게 하는 그 무엇, 우리들은 그것을 늘 찾고 있는 것이다.

Saturday, October 11, 2014

에쿠니 가오리- 마미야 형제: 2014. 10. 12

84. 매미가 운다. 저녁 나절인데도 하늘은 아직 푸르고 여름 냄새가 난다.

121. 욕실 문을 열고 문지방을 넘어서서, 샤워 꼭지를 틀며 생각한다. 내가 좋아하는 남자는, 좋아했던 남자는, 내 몸을 마음에 들어 했을까. 한순간이라도 좋아. 다른 누구에게도 양보할 수 없는, 세상에 단 하나뿐인 존재로서 사랑해 주었을까?
세상에 단 하나가 아닌, 흔해 빠진, 어찌되든 상관없다는 듯이 아무렇게나, 요리코는 자신의 몸을 씻는다. 깊은 밤, 바깥에서 빗소리가 들려온다.

155. 가을은 쿠즈하라 요리코가 좋아하는 계절이다. 긴소매 셔츠의 산뜻한 감촉이 기분 좋다. 타이츠에 가죽 구두를 맞춰 신으면 발걸음도 힘 있고 등줄기가 꼿꼿이 펴지는 느낌이 든다.

224. 아무것도 모르면서 좋아하는게 아니라,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에 좋아하게 되는 건 아닐까. 아무것도 모르는데 마음이 끌리기 때문에, 좀 더 알고 싶어져서 다가가려는 게 아닐까.

245. 혼마 나오미는 추운 계절을 좋아한다. 눈이 내릴 정도로 추운 계절이 아니라, 그 직전의 딱 요맘때 같은 날씨. 공기가 팽팽하고 맑아서, 자신의 피부까지 투명해지는 느낌이다. 낙엽을 밟으며 걷는 감촉도 무척 근사하다.

288. 자신 안에서 너무나 많은 행복을 이끌어 낼 줄 아는 형제에게, 오늘과 내일은 언제나처럼 소박하고 즐겁게 흘러간다. 가끔은 의기소침하게 흘러갈지라도 이들에게는 연애와 또 다른 담백한 인간 관계가 있다. 추억을 나누고 즐거움을 나누고 일상을 나누는.. 어쩌면 현실에서는 그렇게 담백한 인간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연애에 빠지는 것보다 어렵지 않을까.
이 겨울, 따뜻하고 유쾌한 기운이 살아 숨쉴 것만 같은 형제의 집에 초대 받아 가고 싶다는 마음이 새록새록 들면서, 쉽게 달라질 것 같지 않은 형제의 그 후 이야기가 벌써부터 기다려진다.

Friday, October 10, 2014

요시모토 바나나: 허니문 - 2014. 10. 9

22. 밖에서는 태양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는데, 복도는 캄캄했다. 곰팡내와 향 냄새가 섞인 듯한 냄새가 났다. 그 조금은 서양식 분위기가 나는 낡은 일본식 집은, 천장이 매우 높았다. 빛은 모두 틈새로만 새어들고 있었다. 그 탓에, 여름이, 생명의 힘이 멀게 느껴졌다.

31. 짐으로 창문이 절반이나 가려져, 창모양의 절반만큼, 희미한 빛이 네모나게 다다미에 비치고 있었다. 나는 거기를 떠다니는 빛나는 먼지를 보면서 '그냥' 이라고 말했다.

32. 올리브와 함께 아직 젖은 채 빛나고 있는 길을 걸었다. 갑작스럽게 내린 비라서, 벚꽃이 우수수 떨어져 있었다. 동네 고등학교 옆을 오르는 벚나무 가로수길은 온통, 막 떨어진 예쁜 모양의 꽃잎으로, 분홍빛 카펫처럼 장식되어 있었다. 지는 햇빛을 받으며 서 있는 나무들에는 아직도 흐드러지게 꽃이 피어 있고, 물방울을 매단 채 싱그럽게 빛나고 있었다. 길에는 아무도 없고, 세계는 마냥 호화스런 금빛과 분홍빛 광선으로 가득하여, 이 세상이 아닌 듯한 광경이었다.
'올리브, 벚꽃 참 예쁘지'
하고 나도 모르게 말을 걸었다. 그러자 올리브는 새카만 맑은 눈으로 나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마치, 금빛지는 해보다, 벚꽃보다, 나를 보고 싶다는 표정으로. 그런 눈으로 보지 마, 하고 나는 생각했다. 보물과 줄줄이 이어지는 산과 바다를 쳐다보는 듯한 눈, 죽음은 딱히 두렵지 않다, 다만 너와 만날 수 없게 되는 것만이 안타깝다, 그런 눈이었다. 사실은 나도 올리브도 알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날의 분위기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모든 것이 너무 아름다웠다. 이미 볼품없어진 올리브의 털도, 금빛이었다. 모든 것이 우리 둘이 어린애였던 시절로 돌아가는 듯한, 어느 쪽이나 영원히 살아갈 듯한 느낌이 들었다.

49. 무지개를 만들면서, 흙탕물에 비친 아름다운 하늘, 흐르는 구름을 보면서 나는 생각했다. 이렇게 사소하고, 웃어넘겨 버리는 일이, 인생을 구성하는 세포라고.

72. 인생에는 때로, 그 사람이 원한다면, 하고 모르는 척하고 있을 수만은 없는 일이 있을지도 모른다. 직감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무언가를 위해 필사적이 되거나, 자신이 미덥지 않아도, 정체를 알 수 없는, 훗날이 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행동을 무슨 일이 있어도 하는 편이 좋은 일도 있을지 모른다.

89. 무언가가 우리만 두고 떠나간 듯한 느낌이 들어, 잠시 멍하고 있었다. 날씨는 좋고, 히로시의 오래된 집, 샤워기도 없는 목욕탕에 물을 받아, 환한 속에서 물에 잠겼다. 유리창에 김이 서려, 태양빛을 부옇게 통과시키고 있었다. 낡은 타일 특유의, 정겨운 색조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97. 혹 나의 많은 것들이 전부 잘못된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될 때, 나는 역시 늘, 사계절의 변화가 마치 다도처럼, 어디 한 군데도 빈틈없이 한 가지 일이 그 다음으로 흘러가는 것을 늘 뜰에서 보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피고 지는 꽃도, 땅으로 떨어지는 낙엽도, 그 다음에는 모두 어느틈엔가, 먼 곳에서 연결되어 있다. 인간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을까, 생각하고, 마음을 다잡았다.

105. 마술 같은 파란색 공기에 서서히 아침 햇살의 명랑한 기운이 섞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새벽은 무엇을 고백해도 용서받는 애매한 시간이었다. 꿈과 현실의 경계에서, 히로시는 그저 울기 위해 울었다.

114. 그냥 보통 때처럼 하고 있는데 무리를 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면 문제, 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러나, 나한테는, 언제나, 대개의 경우, 모두가 무리를 하고 있는 듯이 보였다. 왜 그렇게들 애를 쓰는지, 무엇을 향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렇다고 내 인생이 그렇게 멋진 일들로 충만해 있는 것도 아닌데. 나의 인생은, 뭔가 반짝반짝하는 것이 지나가고 난 다음의, 아련하게 반짝이는 꼬리 부분만을 향유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124. 그리고 눈이 내릴 것처럼 추운 긴자 거리를 걸어, 호텔까지 데려다 주었다. 엄마는, 있지, 마나카짱, 손 잡아도 돼? 라고 물었다. 나는 새엄마나 히로시와도 그런 적이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엄마는 억지로 내 손을 잡았다. 할 수 없어서, 마음을 바꾸어 즐겁게 걷기로 하였다. 그 손의 따스함과 공기의 싸늘함, 길 가는 사람들의 하얀 숨, 밤하늘을 배경으로 솟아 있는 와코 백화점, 미츠코시 백화점을 올려다보며 어째 외국 같네, 하고 생각한 것도, 잡은 손을 앞뒤로 흔들며 노래를 불렀던 일도, 정작 그때는 별일 아닌 것처럼 여겨졌는데, 인상에 깊이 남아 있다. 즐거웠던 것이다.
지난 일을 떠올리며, 그때 느꼈던 것보다 훨씬 더 즐거워질 수 있어, 그 사람의 소중함을 아는 때가 있다.

150. 세계는 나 따위 어떻게 되든 아무 상관 안하지만, 세계는 재미있고 아름답고 애정 같은 것으로 넘치고도 있고, 뭐가 있을지 몰라서, 그 안에서 헤엄치고 있는 나는 조금도 불쌍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어. 내가 밤바다를 떠다니는 천사 같은 기분이 들었어. 동네의 불빛도, 물도 별도 또렷하고 선명하고... 너무 천진난만하고, 청렴하고, 보호받고 있는, 떨고 있는 조그만 존재로 여겨졌어. 아주 멋진 장소에 있는 듯한... 그후로는, 전후를 불문하고 그처럼 감동적이고 아름다운 것을 본 적이 없다.

156. 강렬한 햇살 속, 별장으로 향했다. 새하얗고 낡은 별장이었다. 창문으로 여러 나라에서 온 신혼 부부와 돌고래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해변을 산책하고, 몸을 태우기도 하고, 다이빙을 즐기는 모습이 보였다. 섬의 태양빛은 물보다 몇백 배 정도는 하얗고, 몸 속까지 그 빛으로 넘칠 듯하였다. 천장에서는 천천히 선풍기가 돌아가고, 그 그림자가 바닥에 부드럽게 드리워져 있었다.
'너무너무 멋지다. 나, 이렇게 멋진 곳에 와보기는 처음이야. 빛은 강하고, 모래는 하얗고, 바다는 아름답고, 사람들은 모두 즐거워 보이고, 마치 천국 같아. 꿈속에서 보는 풍경 같아.'

Friday, September 19, 2014

에쿠니 가오리: 웨하스 의자: 2014. 9. 19

76. 내게 인생이란 운동장 같은 것이다. 입구도 출구도 없고, 물론 어딘가에는 있을 테지만, 있어도 별 의미가 없다. 무질서하고, 전진도 후퇴도 없다. 모두들 그곳에서, 그저 운동을 할 뿐이다. 나는 그곳에서, 어쩔 줄 몰라 한다.

86. 왜일까, 나는 어른인데, 때로 어린애의 시간에 갇혀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114. 나는 애인을 위해 그림을 그리는 것은 아니지만, 애인을 위해 하루하루를 살고 있으니까, 내게 그림을 그리는 것과 살아 있다는 것은 비슷한 일이다. 그러니까 결국은 애인을 위해서 그림을 그리는 셈이다.
언어는 아무 소용이 없다. 언어로 사고하려 하면, 늘 같은 자리를 맴돌고 만다.

120. 나는 지금 아파트 베란다에 있고, 활짝 연 창문으로 방안 공기를 환기시키려 한다. 방안에는 커피잔이 두 개, 그대로 놓여 있다. 밖은 춥고, 구름이 끼여 있고, 팽팽한 기운이 느껴진다. 베란다는 여전히 복작복작하고, 화분이니 빈 병이니, 망가진 캔버스가 쌓여 있다.

123. 애인이 돌아간 후의 방은 휑하고, 나답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침대에 동그마니 누워, 나는 어둠을 쏘아보고 있다. 절실하게, 줄리앙처럼 의연한 태도로 애정을 받아들이고 싶어한다. 백퍼센트의 신뢰와, 백퍼센트의 고독을, 피하지 않고 마음에 또렷이 새기고 싶다고.

나의 인생은 때로는 어린애의 그것처럼, 때로는 노인의 그것처럼 보인다. 절대 서른여덟 살 여자의 그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나는 갇혀 있다고 느낀다. 애인의 마음속에, 또는 어린애인 내 머리 속에.

132. 애인을 만나기 전에도, 누군가를 좋아한 적이 있는데. 어떻게 좋아하게 되었을까. 대체 어떤 남자들이었을까. 모든것이 너무 멀어서 마치 타인의 기억 같다. 내 자신의 과거가 타인의 추억담을 듣는 정도로만 느껴진다.
이 역시 내가 갇혀 있는 탓이다. 나는 갑자기 두려워진다. 그래서 다음에 애인을 만나면 꼭 말해야겠다고 생각한다. 누군가를 어딘가에 가둘 거면, 그곳이 세계의 전부라고 믿게 해줘야 한다고. 자유 따위 부여해서는 안 된다고.

134. 햇살.
나는 겨울 햇살의 양감을 좋아한다. 그것은 실로 풍성하게 나의 창가를 찾아준다. 아주 잠깐. 똑같다. 햇살도 동생이나 애인과 마찬가지로, 내 집을 찾아왔다가는 돌아간다.

141. 조명을 낮춘 침실은 어둡고, 샤워 코롱 냄새가 난다.
나는 애인 덕분에 이 세상에 겨우 발을 붙이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그것은 기묘한 감각이다. 애인이 전부라고 느끼는 것이 아니라 애인과 함께 있는 내가 전부라고 느낀다. 나는 그것을, 외롭다고 해야 하는지 충족돼 있다고 해야 하는지 몰라 혼란스럽다. 옳다고 생각해야 하는지 옳지 않다고 생각해야 하는지 몰라, 그만 생각을 포기한다.

144. 아무 부족함이 없다는 것은, 그 자체가 무언가가 결여돼 있다는 것이다.

156. 봄. 어느 날, 일터의 창문을 연 나는 봄이 왔다는 것을 안다. 늘 그렇다. 봄은 홀연히 나타난다. 공기가 달콤하고 부드럽게 풀어진다. 그것은 어제까지의 공기와 전혀 다르다.

164. 길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착각이야. 인생은 황야니까.

181. 나는 아틀리에에서 책을 읽고 있다. 봄햇살이 비치는 아틀리에에서. 애인은 어제, 일 때문에 여행을 떠났다.
여드레 간, 애인은 나의 세계 어디에도 없다. 애인의 부제에 이 거리의 모습이 바뀌고, 내 모습이 바뀐다. 나는 외로움을 느끼지 않는다. 어제까지의 나는 애인과 함께 어디론가 떠나고 말았다. 여기에 있는 것은, 애인을 만나기 전의 나다.
나는 해방된 기분이다. 하지만 그것은 자유가 아니라, 조그만 죽음 같은 것이다.

190. '보고 싶었어.'
나는 그렇게 말했지만, 그것은 진심이 아니었다. 보고 싶었다는 느낌이 든 것은, 방금 전이다. 그때까지는, 그런 생각은 꿈에도 없었다. 아무렇지도 않았다. 애인 따위 만난 적도 없다고 생각하면서 지냈다. 달리 방법이 없었다.
나는, 자신이 몹시 망가져 있다는 것을 안다.

206. 사람은 자기 좋을 대로 살 수 있어.

210. 여름은 입을 쩍 벌리고, 정체 모를 불안과 나른함으로, 그저 거기에 있었다. 한없이.
앞날이란 말 바깥쪽에서 나는 살고 있었다. 처음부터 내 의지와는 무관하게.
그것은 체력이 필요한 일이었다. 뭍이 없는 바다에서 혼자, 방향도 모른 채, 이유도 목적도 없이, 헤엄칠 줄 모르는데 헤엄쳐야 하는 것과 같았다. 그리고, 더욱 비장한 것은 나는 뭍이 있다는 것조차 몰랐다는 것이다.

인생에 절망한 것은 아니다. 그때부터 줄곧, 인생과 절망은 같았다.

213. 에어컨이 켜져 있어 실내 온도는 낮은데, 활짝 열어놓은 창문으로 뜨뜻미지근한 바람이 흘러든다. 햇살은 이미 기울었지만, 한낮의 열기가 아직도 여운을 남기고 있다.

246. 자신의 전 존재를 바쳐 애인을 사랑하는 여자에게 이미 그런 세상의 가치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홍찻잔에 곁들여진 각설탕이 홍차 없이는 의미를 갖지 못하듯, 애인 없는 자신의 삶은 무의미하기에 절망한 여자. 자신을 위해 그림을 그리지만 애인이 없는 상태의 자신은 이미 자기 자신이 아니기에, 결국은 애인을 위해 그림을 그리게 되는 여자. 이런 여자에게 사랑은 곧 절망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마치 어린애가 부모의 보호와 가정이란 울타리에 갇혀서야 존재를 지탱할 수 있듯이, 그녀는 애인의 사랑이란 울타리에 갇혀서야 존재를 유지할 수 있으니까요. 한없이 어른이기를 소망하지만, 애인의 품에 안기지 않으면 숨도 쉴 수 없기에 그녀란 존재는 외적으로는 어른이어도 한없이 어린애에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그녀가 어른이기를 주장하고, 절망을 벗어던지려 할 때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애인과의 헤어짐이고, 이 헤어짐은 곧 그녀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Saturday, September 13, 2014

에쿠니 가오리- 언젠가 기억에서 사라진다 해도: 2014. 9. 13

125. 때로는 엄마가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내가 너무 어린 탓이 아니라 엄마가 나이를 너무 먹은 탓이라고 생각한다. 이 둘은 똑같지 않다. 전혀 다른 차원이다. 무언가를 이해하기에 아직 어리다면 언젠가는 이해할 때가 온다. 하지만 무언가를 이해하기에는 너무 늙었다면, 그 사람은 영원히 그것을 이해할 수 없다. 그것은 아주 슬픈 일이다.

147. 일단 한 번 죽은 후에 다시 사니까, 야, 그거 편하던데.

일단 죽은 후에 다시 산다. 그 말이 나의 뇌리에 또렷하게 각인되었다. 일단 파괴한다는 것. 나 자신은 물론 주위까지.
하지만 동시에 나는 알아버렸다. 파괴하면 돌아갈 장소가 없어진다는 것을. 이런 곳에서 일하면서 여름휴가 때나 설날 때나 홀로 아파트에서 지내고, 아르바이트하는 여고생에게 친구 대접이나 받는 오니시 씨처럼.

161. 오이의 초록은 어쩜 이리도 예쁠까. 표면의 짙은 초록과 가로로 동그랗게 잘랐을 때의 싱그럽고 엷은 초록.
밖은 비. 나는 부엌에서 혼자 오이를 바라보고 있다. 오이는 거의 늘 냉장고에 들어 있으니까, 보고 싶을 때 볼 수 있다. 오이가 늘 냉장고에 있다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원할 때 수중에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빗소리. 창문과 베란다 난간과 나무 잎사귀에 내리는 빗소리. 비 오는 날의 부엌은 조금 쓸쓸하다.

181. 어두운 밤의 베란다에서, 멀리 반짝이는 역사의 불빛을 보면서 아이들의 귀가를 기다릴 때, 흐릿한 오후, 밀린 설거지를 하면서 부엌 창으로 건녀편 아파트 베란다에서 흔들리는 빨래를 보았을 때, 모두 잠든 깊은 밤, 수도꼭지에서 똑똑 떨어지는 물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릴 때, 어쩌다 올려다 본 하늘에서 구름이 꼼짝도 하지 않아 마치 긴 시간이 정지된 것처럼 느껴질 때... 그런 때면 기억 창고 속의 내가 지금의 나를 마치 다른 사람 보듯 바라보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든다. 그러니, 나는 있는 것이다. 어디엔가, 내가 모르는 어느 깊은 틈 속에.

Monday, August 25, 2014

에쿠니 가오리: 취하기에 부족하지 않은: 2014. 8.15

116. 발바닥이 보송보송하고 따스할 것! 행복의 첫째 조건이다.

139. 내게 목욕은, 현실을 떠나 다른 공간으로 가는 짧지만 결정적인 타임 슬립이다. 그러니까 타월이나 로브는 현실로 돌아온 첫 순간 내 몸에 닿는, 이른바 내가 있어야 할 현실 세계의 대표인 셈이다. 그러니 폭신폭신하고 보송보송하고 따뜻하기를 바란다.

144. 가슴에 세계의 끝을 품은 자는 세계의 끝으로 가야 한다.

외로움은 언제나 신선하다.

그래서 또 다른 곳에서는 '좋아하는 것'에 착안해서 '잠자기', '놀기', '핫초콜릿', '보송보송 따스한 남자의 손'이라고 써본다.

171. 이제 곧 여름이 온다는, 계절의 변화에 대한 반가움일까. 실제로도 여름의 해거름에는 각벼한 분위기가 있다. 그리움이라 해도 ㅈ호고 애매함을 허용하는 공기라 해도 좋을 무언가가.
계절의 변화에는 정말 과묵하고 압도적인 평온함이 있다. 사람들이 날마다 어떤 문젯거리로 골머리를 썩고 얼마나 우왕좌왕하며 살아가든 아무 일 아니라는 듯이, 때가 되면 계절은 어김없이 바뀐다. 아주 오랜 옛날부터 그랬던 것처럼. 문득 그 사실을 깨달아, 기쁘고 평온해지는지도 모르겠다.

182. 폭소는 원한다고 쉬이 얻어지는 게 아니다. 폭소는 돌아오지 않는다.
키득, 한 번 웃고 말 사건이나 농담은 나중에 다시 생각하면서도 키득거릴 수 있고, 다른 사람에게 전하면 그 사람 역시 키득 웃을 수 있다. 하지만 폭소는 그렇지 않다.
폭소는 일종의 광기, 조그만 광기라고 생각한다.
한 인간의 내면에서 무언가가 무언가를 건드리는 것이다. 건드림을 당한 쪽의 무언가는 그 사람의 인생 전체와 연결된 것이고, 그 근간이 깊은 혼돈 속에 있기에, 웃음이 끝없이 터져 나온다. 끝없이 재미가 이어진다.
10대를 가리켜 바람에 구르는 낙엽만 보아도 재미나는 시절이라고 한다면, 그 나이 때가 별 자가 없이 광기를 드러내기 쉬운 시기인 것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폭소를 터뜨렸을 때의 일을 생각하면, 대체 뭣 때문에 그렇게 웃었을까 의아한 경우가 많다. 극단적으로는, 웃으면서도 뭐가 그렇게 우스운지 모른다는 것을 알기도 하고, 또 그렇게 말하기도 한다. 웃고 있는 동안, 그 웃음이 다른 감정을 환기한다. 그리고 누구와 함께 그렇게 웃고 있다는 것에 대한 감상- 기쁨, 행복감 혹은 반대로 기묘함, 걱정, 자포자기하는 마음, 이런저런-과 이어지면서 웃음이 박차를 가한다.

189. 절대 돈의 문제는 아니다. 케이크를 스무 조각씩 사도 아무도 뭐라 하지 않고, 아무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것. 주위의 눈치를 살피며 움찔거리지 않아도 된다는 것. 아마도 다른 사람들은, 손님이 꽤나 많이 오는 모양이지, 하고 상상할 거싱다.
모르는 사람이 있는 곳에서 움찔거리지 않아도 된다는 건 참 마음 편한 일이다. 자유를 그렇게 정의해도 좋지 않을까 싶을 만큼.
운전을 하든 말든, 케이크를 몇 개 사든, 다 내 마음이란 사실이 때로 놀랍고, 실제로도 놀란다. 아직도 그 사실에 충분히 적응하지 못한 것이다.

190. 복잡한 전철을 탔을 때면 간혹 생각한다. 모두들 당연하다는 표정으로 어른처럼 행동하고 있지만, 사실 과거 어느 때에는 모두 어린애였다. 거짓말을 하고 투정을 부리고 울고 떼를 쓰고 목욕을 싫어하고 잠자다 오줌을 싸고 이를 닦지 않는 어린애였다. 그런 생각을 하면 신기하면서도 끔찍하다. 말이 통하는 어른 같은 얼굴을 하고 있지만, 말이 통하지 않는 어린애가 성장했을 뿐이다. 그러니 믿을 수 없다.
어린이에게는 세계가 온통 불합리하다. 내게는 그 시절의 기억이 아직도 절절하게 남아 있다.

192. 우리네 눈에는 그저 자잘하고 사소하기만 한 것들이라서 늘 무심히 스치고 지나갈 뿐, 새 생명을 부여하지도, 새로운 의미를 찾아내지도 못하지요.

그래서 그녀의 에세이를 읽는 즈거움은 작은 것들에 쏟아지는 애틋함과 작은 것들마저 놓치지 않는 늘 깨어 있는 의식과 새로운 의미를 탄생케 하는 애정 어린 숨결을 느끼는 즐거움이며 그녀의 일상을 엿보는 동시에, 그런 것들이 그녀의 작품에서 어떻게 살아 움직이는지를 알게되는, 그런 즐거움입니다.

Sunday, August 3, 2014

야마다 에이미- 돈 없어도 난 우아한 게 좋아: 2014. 8. 3

20. '너'라고 불리는 것도 좋은 일이다. 상대에게 살짝 얕보이는 느낌이 든다. 좋아하는 남자가 자신을 얕보는 걸 흐뭇하게 느낄 때, 사랑하고 있구나, 하고 생각한다.

22. 지금까지 사카에만의 공간이었던 이 집 구석구석에 내 냄새가 스며든다. 사카에가 건네준 보조 열쇠를 처음 사용하던 날의 흥분은 지금도 잊지 못한다. 열쇠 구멍에, 나를 불어넣었다. 그 소리, 찰칵. 무언가를 덥석 깨문 기분이었다. 남자가 먹어도 된다고 허락한 것은, 생활의 터전 모두. 그는 무척이나 친절하다. 몸은 물론 갖가지를 내게 던져 준다. 내던지는 그 멋진 폼. 자신의 세계를 소중히 여기지 않는 것도 아름다움이라는 느낌이 든다. 집착 따위를 매력의 하나로 생각하는 저자의 남자들과는 차원이 다르다. 그래서 그렇게 말했더니, 나 애당초 별다른 세계 갖고 있지 않았어, 하며 그가 웃는다. 별거 없는 세계. 그것이 얼마나 삶을 편안케 해 주는지.

35. 남들이 생각하는 듬직함과 ㅐㄴ가 원하는 듬직함은 결정적으로 다르다. 나는 체격이 크고 경제력이 있다고 안심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저 편리함에 지나지 않는다. 가령 내가 하려는 말을 정확하게 알아듣는 사람을 만났을 때, 듬직하다 싶어 눈시울이 뜨끈해진다. 허풍처럼 들릴지 모르겠지만, 정말이다. 그런 순간, 나 자신도 놀랄 만큼 말이 많아진다. 손님을 대하는 장사를 하는 주제에 무뚝뚝하기로 자타가 공인하는 나이지만, 전하고 싶은 말이 쏙쏙 전해지는 사람 앞에서는 엄청난 수다쟁이가 된다. 하지만 그런 걸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사귀다 헤어진 몇몇 남자와 많지 않은 친구들 말고는. 나는 어쩌면 남들 눈에는 외롭게 나이만 먹은 여자로 비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정녕 외로움을 느끼는 때는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과 방글거리며 관계해아 하는 경우이다. 통하는 말이 얼마 안 되는 사람과 가까스로 소통해야 하는 장면에 부딪치면, 왠지 모르게 비참해진다.

48. 그는 나날의 식량을 귀여워하고 있다! 나는 이렇게 일상을 어여삐 여기는 사람을 달리 모른다.

다다미 위에 누워 옆에 있는 책을 뒤적거리다 보니 잠이 왔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비가 내리고 있다. 빗방울이 빗물 통을 규칙적으로 두드린다. 왠지 마음이 착 가라앉는다. 옜날 집의 효과다.

67. 경험은 사람에게 배움을 선사하지만, 사람을 강하게 하지는 않는다. 강한 척하는 기술을 터득하게 할 뿐, 오히려 나는 점점, 겁쟁이가 되어 가고 있다. 겁날 것 없던 때가 그립다. 하지만, 이미 돌아갈 수 없고 돌아가고 싶지도 않다. 겁쟁이임을 스스로 알기에 잃고 싶지 않은 것에 대한 강렬한 욕망에 몸을 맡길 수 있다. 경험이 일궈 낸 풍요로운 겁쟁이.

80. 소극적인 룰이 남녀 사이에 적용되는 순간, 열은 이내 정상으로 돌아간다. 예의 바른 연애가 따분하다는 것은 고릿적에 알아 버렸다. 착함이란 아이들만의 특권이다. 그리고 버릇없음이란 어른에게만 허가되는 특허다.

100. 아까워 내밀지 못한 마음은 쓸모가 없어지고 끝내는 유통 기간마저 지나고 만다. 그런 것들만 마음에 꼭꼭 보존하다 보면 새로운 마음이 들어찰 장소가 없어진다. 그태껏 나는 상대를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을 늘 아까워한 탓에 결국은 썩어 버리게 했다.

하지만 사카에에게는 마음껏 애정을 쏟는다. 따뜻한 물을 펑펑 쓰듯 함부로 쓴다. 그래도 나는 언제든 촉촉하게 젖어 있다. 왜냐하면 그 역시 편리한 남자로 내게 애정을 하염없이 쏟으니까. 영원히 타인 우선을 신조로 하는 너그러운 인간은 될 수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제 겨우 알았어. 나를 위해 그래 줄 수 있는 인간을 위해서라면, 쉽사리 한 발 물러설 수 있다는 것을.

107. 사카에는 다른 남자들이 젊은 여자의 몸을 칭찬하는 것처럼 평범하게 치켜세우지 안흔ㄷ나. 내가 나인 증거를 찾아, 그 점을 칭찬해 준다. 그가 말하기를, 지우의 몸에는 결점이 없다나. 정말 고마운 말이다. 툭 튀어나온 배는 큐피처럼 유머러스하단다. 여기가 갓난아기처럼 귀여워, 란다. 푸훗, 눈물이 날 지경이다.

Sunday, July 27, 2014

에쿠니 가오리- 낙하하는 저녁: 2014. 7. 28

13. 가령 두 사람 사이에 생기는 혐오감 내지는 권태감 같은 것을, 한쪽은 느끼는데 다른 한쪽은 느끼지 않을 수 있을까. 다케오는 과연 언제부터 헤어짐을 생각한 것일까.

16. 나는 다케오가 나간 후에도 울부짖지 않았다. 일도 쉬지 않았고 술도 마시지 않았다. 살이 찌지도 야위지도 않았고,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긴 시간 수다를 떨지도 않았다. 무서웠던 것이다. 그 중 어느 한 가지라도 해버리면 헤어짐이 현실로 정착해버린다. 앞으로의 인생을, 내내 다케오 없이 혼자 살아가야 하다니, 나로서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29. 나는 망령이었다. 다케오가 스티브가 이 세상을 사는 사람이라면, 나는 이 세상을 살지 않는 사람. 물 흐르듯 일상을 살면서도 망령인 내게는 돌아갈 장소가 없다. 간단하다.
다케오 옆에 누가 있든 상관없었다. 다만 나는 다케오의 것이다.

37. 그 다음주는 내내 날씨가 화창했다.
너무 규칙적인 생활을 하는 탓에, 변화없는 날씨가 감각을 뒤틀어 놓는다. 어제와 오늘, 오늘과 내일의 구별이 불분명해진다. 하기야 그런 편이 내게는 편했다. 하루하루의 윤곽이 흐릿하면 흐릿할수록 매사에 대한 인식과 현실감도 엷어진다.

47. 집 안으로 들어가자 하나코가 거실 소파에 축 늘어져 자고 있었다. 바닥에는 하얀 액체가 남아 있는 컵. 창문이 열려 있어 저녁 바람에 커튼이 흔들린다. 낮이 참 많이 길어졌다.
"감기 걸리겠네."
불을 켜고 말하자, 하나코는 일어나 나른한 목소리로, 어서 와, 라고 말했다. 어서 와. 어린애 같은 말투. 나는 가슴이 벅차오른다. 1밀리그램의 오차도 없이, 언어가 정확한 중량을 지니고 있다. 그렇게 정확한 무게의 '어서 와'를 오랜만에 들어본다.

49. 하나코는 동물 같지도 식물 같지도 않다.
바로 옆에 있는데도, 그 사실을 의식하게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살아 있음의 겨추장스러움이 없는 사람, 생기가 없다는 뜻에 아주 가깝다. 그러면서도 음침한 느낌은 없고, 오히려 건조하고 밝다.

51. 하나코는 고립돼 있었지만, 관대했다. 목욕탕에서 이따금 콧노래 소리가 흘러나왔다. 우리는 저녁밥을 같이 먹었다. 정말 이상한 일이지만 하나코는 전혀 거슬리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130. 하나코는 모른다. 이때 나는 확신했다. 한 남자와 인생을 공유할 때의, 흔해빠진 일상에서 길어 올리는 행복, 믿지 못할 기적 같은 순간의 축적.
예를 들면 겨울 아침, 다케오 옆에서 당연한 일이듯 눈을 뜨는 것. 차가운 발을, 건장하고 따스한 생명력에 넘치는 다케오의 발에 휘감을 때의 안심감. 뿌연 유리창. 시간이 멈춰버린 듯한 몇 분.
예를 들면 역에서 거는 전화. 일을 끝내고 돌아오는 다케오의 목소리. 드러누워 열심히 추리 소설을 읽고 있던 나는, 그 순간, 모든 것을 떠올린다. 만남에서 그때까지의 모든 것을.
그런 것들을 당연하게 여길 수 있는, 넉넉함.
하나코는 모른다. 바란다고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

168. 그날, 목욕탕에서 나는 오랜만에 거실에 하나코가 있는 느낌을 만끽했다. 그것은 아주 자연스럽고 특별한 느낌이었다. 하나코는 아마도 소파에 누워 만화잡지를 열심히 읽고 있으리라. 아까 메밀 국수를 먹고 돌아오는 길에 편의점에 들러 산 잡지다.

하나코를 묶어둘 수 있는 곳은 어디에도 없다. 하나코에게는 도리라는 것이 없다.

176. 다들 너를 만나고 싶어해. 왜 그럴까. 너는 다른 사람한테는 티끌만큼도 신경 안 쓰고, 아무 목적도 없이 홍콩 같은 데나 훌쩍 다녀오고 그러는데.

Saturday, July 19, 2014

에쿠니 가오리 - 호텔 선인장: 2014. 7. 19

154. 그러나 사실, 모자는 이 아파트가 좋았습니다. 키작은 나무가 멋없게 심어져 있는 마당이며, 어둑어둑하니 선선한 현관 홀, 밖에서 돌아왔을 때 느끼는, 꼭 좋다고는 말할 수 없는 습기 배인 독특한 냄새. 덜컹덜컹, 놀랄 만큼 큰 소리를 내며 움직이는 엘리베이터.

요 며칠 모자를 고민하게 만드는 것은 '덧없음' 자체가 아니라, 자신이 어느새 그것을 완전히 잊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요시모토 바나나 - 도마뱀: 2014. 7. 15

17. 자기가 사는 역에 이제 두 번 다시 내리지 않아도 괜찮아.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인걸.

52. 죽는다는 건 뭘까? 존재가 없어져서 아무 말도 해주지 않고, 지금의 여기에 푹 파묻혀 있는 코의, 바로 그 짓누르는 힘의 원천. 그렇게 하고 싶다는 의지를 담은 그릇. 그것이 사라져 없어지는 것.

72. 사실은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이 손발로 느끼고 실현시키기 위해서 우리는 육체를 가지고 태어났기 때문에.


요시모토 바나나 - 티티새: 2014. 7. 3

44. 인생은 연기, 라고 나는 생각했다. 의미는 똑같아도, 내게는 환상이란 말보다 친근한 느낌이 들었다. 그 저녁, 사람들의 물결 속에서 아찔하도록 그것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한 사람의 인간은 온갖 마음을, 모든 좋은 것과 더럽고 나쁜 것의 혼재를 껴안고, 자기 혼자서 그 무게를 떠받치고 살아가는 것이다. 주위에 있기 좋은 사람들에게 가능한 한 친절을 베풀 수 있기를 바라면서, 혼자서.

48. 그래도 가끔은, 잠이 안 올 정도로 바다가 그립다. 도무지 어쩔 수가 없다. 종종 가는 긴자 거리에서는, 바람의 방향에 따라 불현듯 바다 냄새가 코끝을 스칠 때가 있다. 거짓말도 아니고, 허풍도 아니고, 그 순간 나는 소리를 지를 뻔한다. 온몸이 순식간에 그 냄새에 빨려들어 옴짝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슬퍼진다. 울고 싶어진다. 그런 때는 거의 늘 날씨가 맑고, 투명한 하늘이 한없이 이어지고, 나는 손에 든 야마노 악기와 쁘렝땅 백화점의 쇼핑백을 내던지고 달려가, 소금 냄새가 눌러붙은 그 더러운 제방에 서서 한껏 바다 냄새를 맡고 싶어진다. 이렇게 강렬한 충동도 언젠가는 희미해질 것이라는 아픔, 이것이 향수라는 것일까.

53. 츠구미는 나를 보면서 웃었다. 오후의 방에서, 책을 읽으려고 켜둔 불빛이 유독 하얗게 빛나고, 내내 나직한 멜로디가 흐르고 있었다. 테이프가 다 돌아갈 때까지 귀 기울이며 우리는 조용히 잡지를 읽었다. 고요한 방에, 책장 넘기는 소리가 팔락, 팔락, 한없었다.

57. 어차피 사람은 언제 어디에 있든 어느 정도는 외로운 이방인이라는 것을, 멀리 항구각 보일 때면 분명하게 알게 되기 때문이리라.

61. 열린 창, 방충망 너머로 해수욕을 하고 돌아오는 사람들이 몇 번이나 지나갔다. 웃음소리가 밝게 울린다. 동네 여관에서는 다들 저녁 식사 시간을 맞을 즈음, 온 동네에 활기가 넘친다. 아직 하늘은 밝고, 텔레비전에서는 저녁 뉴스가 흘러나온다. 바닷바람 냄새가 다다미를 스치고 지나간다. 복도에서는 분주한 발소리가 오가고, 목욕을 하고 나온 손님들이 왁자지껄 지나간다. 먼 바다에서는 갈매기 울음소리가 들리고, 창밖을 올려다보자 전선 사이로 가슴이 덜컥 내려앉을 정도로 빨간 하늘이 보였다. 모든 것이 너무도 여전한 저녁이었다.
영원히 계속되는 것은 없다, 는 것을 알고는 있었ㅈ만.

62. 하루하루, 이렇다 할 만한 일은 없었다. 이 조그만 어촌에서, 자고 일어나고, 밥을 먹고 살았다. 때로는 상태가 나쁘기도 하고 좋기도 하고, 텔레비전도 보고 사랑도 하고, 학교에서 수업을 받고, 그리고 반드시 이 집으로 돌아왔다. 그 평범한 반복을 되새겨보면, 거기에는 늘 따스하고 보슬보슬하고 깨끗한 모래 같은 무언가가 남아 있다.
아스라한 그 온기를 온몸으로 느끼며, 여행의 노곤함에 조금은 졸린 나는 오랜만의 행복을 황홀하도록 만끽했다.
여름이 온다. 이제 여름이 시작된다.
반드시 한 번은 지나쳐야 하고, 그러나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여름. 그런 것을 잘 알면서도 평소처럼 흘러가 버릴 시간은 여느 때보다 조금은 팽팽하고 서글프다. 그때 그 저녁, 방에 앉아 있는 우리들 모두는 그렇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마음 아프도록 잘 아는데, 그런데도 행복한 기분이었다.

74. 가끔, 신기한 밤이 있다.
공간이 약간 어긋난 듯하고, 모든 것이 한꺼번에 보이는 그런 밤이다. 잠은 오지 않고, 밤새 재깍거리는 괘종시계의 울림과 천장으로 새어드는 달빝은, 내 어린 시절과 마찬가지로 어둠을 지배한다. 밤은 영원하다. 그리고 옛날에는 밤이 훨씬 더 길었던 것 같다. 무슨 희미한 냄새가 난다. 그것은 아마도, 너무 희미해서 감미로운 이별의 냄새이리라.

94. 이렇게 비 내리는 날에는 과거와 미래가 공기에 소리 없이 녹아들어, 떠오르는 것이다.
순간 눈물이 한 방울, 책 위로 떨어진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넘쳐흐르는 눈물.
퍼뜩 귀에, 비가 토독토독 처마를 적시는 소리가 들리고, 나는 '대체 뭐지, 지금 이 눈물은' 하는 기분으로 눈물을 닦는다. 그러고는 금방 잊어버리고 책을 다시 읽는다.

121. 사랑이란, 깨달았을 때는 이미 빠져 있는 거야, 나이가 몇이든. 그러나, 끝이 보이는 사랑하고 끝이 안 보이는 사랑은 전혀 다르지. 그건 자기 자신이 제일 잘 알 수 있어. 끝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즉 더 발전할 수 있다는 뜻이야. 지금 우리 마누라를 처음 알았을 때, 갑자기 내 미래가 무안해지는 듯한 느낌이었어.

123. 지금까지는, 뭐가 어떻게 되든, 그러니까 상대방이 눈앞에서 울고불고 난리를 피워도, 아무리 좋아하는 남자가 손을 잡게 해달라느니 만지게 해달라느니 해도, 뭐랄까... 강 건너 불구경하는 느낌이었어요. 강 건너에 불이 났는데, 이쪽 어두운 강가에서 구경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에요. 언제 불이 꺼질지 뻔히 보이니까, 졸리고 따분했거든요. 그런 건 언젠가는 반드시 끝나니까요. 사람들은 연애에서 뭘 추구할까 하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이번에는 내가 그 안에 있다는 느낌이 들어요. 곁에 개가 있기 때문인지, 아니면 내가 이사를 하기 때문인지, 아무튼. 하지만 쿄이치는 달라요. 몇 번을 만나도 싫증이 나지 않고, 얼굴을 보면 손에 든 소프트 아이스크림을 발라주고 싶을 정도로, 좋아요.

141. 우리는 많은 것을 보면서 성장한다. 그리고 시시각각 변해 간다. 그런 사실을 다양한 형태로, 거듭 확인하면서 나아간다. 그래도 정지시켜 두고 싶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오늘 같은 밤이었다. 온 사방이, 더 이상 아무것도 필요 없을 정도로, 조그맣고 고요한 행복으로 충만해 있었다.


Monday, June 16, 2014

요시모토 바나나- 무지개: 2014. 6. 15

14. 그리고 엄마는 새하얀 햇살 속에서 양산을 펴고 나른한 듯이 몸을 앞으로 숙였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엄마가 무슨 일이 있어도 저기서 지켜봐 줄거야,' 하고 생각하며 멀리까지 뛰어갔던 어린 시절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양산에 가려 잘 보이지 않지만 엄마는 틀림없이 웃고 있을 거야, 하고 생각했던 그 때의 독특한 느낌이 또렷하게 되살아났다.
어린 시절 안심하고 놀이에만 몰입하던 때에 곧잘 느꼈던, 짙은 색깔 꿀처럼 끈끈하고 즐거운 감정, 나는 온몸으로 그 감정을 떠올리고 조금은 괴로워졌다. 어쩜 이렇게 멀리 왔을까, 싶어서.
그때로 돌아가고 싶은 것도 아니고, 지금까지 살면서 괴로운 일만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양산을 쓰고 있는 이방인의 긴 치마 밖으로 곧게 뻗은 하얀 다리와, 새하얀 모래 위에서 너울대는 그림자를 돌아볼 때마다, 나는 몇 번이나 가슴이 메었다.

17. 눈앞에는 부예졌다가 다시 투명해지는 바다, 알록달록한 물고기들, 모래 위를 매끄럽게 스치고 지나가는 가오리가 보였고 입안에는 그 옛날의 소금 맛이 느껴졌다. 햇살이 비치면 산호의 색깔이 바뀌면서 물속에 있는 모든 것이 엷게 빛났다.
마치 꿈같다. 마치 무지개를 보는 것 같다고 나는 생각했다. 이 세계에 일곱 가지 빛깔이 모두 들어있다. 그리고 그 빛들이 서로 번지듯 가늘고 예쁜 리본 띠가 되어 한들한들 퍼져 나가는 것 같았다. 시간이 멈춰 버린 듯 고요한 세계다.
갖가지 일이 있었지만, 다시 이런 아름다운 것을 보고 있다. 살아 있는 한, 언젠가는 괴로운 일도 있으리라. 그래도 또 이렇게 아름다운 것들이 눈앞에 나타나 준다. 반드시.

20. 하지만 그때 그 바닷속에서는 또렷히 깨인 상태였다. 주위가 갑자기 선명하게 보이고, 뜨뜻미지근한 물을 기분 좋게 피부로 느끼고, 살아 있는 것들에 에워싸여 있었다. 때맞춰 막이 오른 것처럼 세계로 들어갈 수 있었다.

햇살은 시시각각 다른 모습으로 물속을 비추고, 모래가 뭉글뭉글 피어오르고, 동네 거리에서처럼 사람과 물고기들이 오갔다.

21. 바다에서 나온 나는 햇살 아래서 몸을 말렸다. 젖은 남색 수영복이 바다 생물처럼 반들반들 빛났다. 눈부심과, 모래범벅이 된 젖은 몸과, 머리칼에서 뚝뚝 떨어지는 투명한 물. 너무도 섬세해 건드리면 생채기가 날 듯한 느낌이 반짝반짝 마음을 채웠다.

22. 아무리 멋진 순간도 반드시 변하고 만다.
그렇기에 그들은 더욱 아름다웠다. 배에 다 탈 수 없어서 단둘이 종업원의 보트에 탄 그들은 손을 꼭 맞잡고 있었다. 얼굴은 눈부시게 밝고, 머리칼은 바람에 흩날렸다. 저녁 햇살이 여유롭게 그들을 어루만졌다. 배는 수면 위로 예쁜 선을 그으며 미끄러지듯 나아갔다.

나는 무슨 일을 하든 시간이 걸린다. 아주 많이 걸린다. 햇살은 그런 나를 이 지상의 모든 것과 구별 없이, 언제까지고 기다려 줄 듯이 따스하게 비췄다.

24. 우리는 더더욱 소박하게, 사이좋게 서로를 돕고 서로에게 기대며 작은 새들처럼 오순도순 살았다.

29. 그들은 굳이 만사를 복잡하게 만들고 지나치게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 같다고 우리끼리 늘 말하곤 했다. 하기야 자연이 없고 돈은 필요하니까 어쩔 수 없겠지, 하는 어설픈 의견을 나누면서, 관광객들이 빚어내는 갖가지 드라마를 그저 남의 일처럼 바라보았다.

32. 그런 세계 속에서, 욕심 부리지 않고 가진 만큼만 사는 데 힘을 쏟고, 자연스러운 흐름을 따르면서도 갖가지로 궁리해서 절약하고 놀고, 아무튼 사람을 중심으로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것의 중요함을 나는 할머니와 엄마에게 배웠다.

33. 청결하고 탁 트여 바람이 잘 통하는 가게 안에서는 시간이 천천히 흘렀다. 아무리 바빠도 개의치 않았다.

36. 그때 예쁘게 포장되어 신칸센을 타고 나와 함께 여행하고 웃음과 기쁨과 감사의 말을 제공해 주었던 스웨터가 이제는 주인 잃은 개처럼 무료해 보였다.
'두 번 다시 그렇게 웃지 못하겠지. 누군가에게 완벽하게 의지하고, 어떤 말이든 받아 줄 걸 알고서 마음 놓고 전화하는 일도 없겠지. 이제는 모두 타인이야.'
결심하듯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 상황이 왠지 남의 일처럼 여겨졌다.
하지만 내게는 즐거운 추억이 있다. 지금은 아프지만, 언젠가는 곰삭아 야들야들해질 수많은 추억이. 백화점에서의 그 귀여운 장면도 지금은 아프고 괴로울 뿐이지만 언젠가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진주처럼 은은한 빛을 발하리라. 그런 생각이 들었을 때, 비로소 첫 눈물이 흘렀다.
하지만 언제? 그런 날이 과연 올까? 그날이 마치 영원처럼 까마득하게 느껴졌다.

42. 일본을 떠나 긴 비행 후에 국내편 경비행기로 갈아타고 처음 모레아의 조그만 공항에 도착했을 때조차, 피곤한 건지 우울한 건지 여행이 즐거운 건지 귀찮은 건지 잘 몰랐다.
남국의 햇살 속에 몸을 한껏 담그고서도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45. 그것은 부모님이 내게 가르쳐 준 것.. 살아가기 위해서는, 담담하게 일하고, 들뜨지 말고, 복잡하고 성가신 일에 휘말리지도 말고, 자기 발이 딛고 잇는 땅을 찬찬히 내려다보면서 걸아갈 것, 그리고 하루하루의 생활과 자연의 힘에서 얻은 행복과 즐거운 기억을 잊지 말 것.

67.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면 내게 세계는 아무런 수수께끼도 재미도 없는 것이 되고 만다. 관찰의 기쁨, 뜻밖의 것을 발견하는 감동도, 일하는 즐거움도, 살아 있다는 실감도 거의 없어지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게 즐거움이란 반드시 아픈 마음과 바꾸어서만 얻을 수 있는 것이었다. 세계와의 연결 고리는 수천 개가 있다. 엄마가 돌아가셔서 외톨이가 된 지금, 그 수를 한층 늘려 가고 싶었다. 그것이 내가 살아 있는 증거처럼 느껴졌다.

70. 하지만 모든 게 그렇듯 보람차게 일하는 사모님 소유인데도, 그 집 안에서 그녀가 놓치고 있는 것들의 방대함에 나는 그만 경악하고 말았다. 이는 사모님만의 문제가 아니라, 나 역시 살아가면서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많은 것들을 놓치고 있고, 그것이 바로 삶의 형태를 선택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71. 매일매일 무엇을 보고 무엇은 보지 않고 지나칠지는 취향의 문제다. 좋고 나쁜 것은 없고 어느 쪽이 보다 낫다는 것도 없었다.
하지만 내가 매일 그들에게서 얻는 것들의 방대함을 생각하면 이러면서 돈까지 받는 것이 미안할 정도였다.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은 모두 이렇게 큰 힘을 발산한다. 그들은 사람이 보살펴 주기만 기다리는 나약한 존재가 아니었다.
그것만으로도 나느 무언가를 배우고, 그들 덕분에 치유되는 느낌이었다.

83. 검은 발, 하얀 가오리. 하늘 높이 울리는 갈매기 울음 소리. 밀려왔다 밀려가는 투명한 물. 먼 하늘에는 붓으로 슬쩍 그린 듯한 하얀 구름이 엷게 퍼져 있고, 빛은 시시각각으로 강렬해졌다. 먹이 주는 여자는 예쁜 천으로 만든 치마를 끌어올려 미끈한 허벅지를 드러내 보이면서 물속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이따금 눈이 부신 듯 손으로 햇살을 가리며 파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84. 어제 내다 넌 ㅃ라래는 보송보송 말랐을 테니까 걷어서 갤 테고, 내일도 없고, 미래도 없고, 오늘만 있는 생활이었다.
그런 단순한 생활이야말로 내가 꿈꾸는 생활이었다.
때로 갖가지 추억이 찾아오고 사소한 놀람을 선사해주는, 그런 생활을 좋아했다.

85. 옛날, 가족끼리 기슈 해변을 따라 달릴 때의 일이다. 그 때 오후의 항구 마을을 몇 군데나 지나면서 그 밝고 고요한 분위기에 놀랐다. 물리저긍로만 고요한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시간이 겹쳐 있는 듯했다. 고대로부터 이어지는, 대지와 바다가 은닉하고 있는 웅대한 시간의 흐름..
쏟아지는 빛은 모든 풍경에 미묘한 그림자르 드리우고, 파도가 잔잔한 만은 오후 속에서 미끄러지듯 살랑살랑 움직였다. 짙은 초록색 물이 가득해서 금망에라도 넘쳐흐를 듯 보였다. 동그스름한 산을 빼곡 채운 풍셩한 초록 역시 넘쳐흐를 듯 산을 뒤덮고 있었다. 그리고 짙은 파란색 하늘이 반짝반짝 빛났다. 항구는 고요했다. 낡은 배와 어망이 콘크리트 제방에 선명한 그림자를 늘어뜨리고 있었다.
자신이 어느 시대, 어느 나라에 있는지도 모를 만큼 아득한 기분이었다. 차 속에는 낮게 음악이 흐르고, 에어컨은 딱 적당한 온도로 시우너한 공기를 뿜어 냈다. 그리고 강렬한 햇살이 내 왼팔을 비추고 있었다. 솜털이 금색으로 빛나고, 피부가 하얗게 보였다.

88. 비록 역사는 짧아도, 사랑온 길 위에는 무수한 추억이 있고, 추억 속에는 이제 만날 일 없는 아빠도 살아 있다. 그렇게 생각하자 기뻤다.

101. 그런데 그 침묵이 조금도 싫지 않았다. 공기 속에서 반짝반짝 빛나는 시간의 알갱이가 보이는 듯한, 맛있는 공기를 한껏 들이마셔 폐 안이 아름다운 것으로 차오르는 듯한, 그런 맛깔나고 풍요로운 침묵이었다.

112. 저녁나절, 바에 가거나 베란다에엇 알코올 한 잔을 마실 때면 시간이 아주 기게 늘어난 것처럼 느껴지고, 한없이 오래 여기 머물 수 있으리라는 기분이 들었다.

122. 이런 때에 불쑥 나타나 인생에 빛을 선사해 주는 존재를, 나는 천사 같다고 생각한다. 잘 모르는 사람인데도 인연이 닿아 잠시지만 깊은 시간을 공유하게 되는 존재를 간혹 만난다. 그런 사람들은 그때의 삶에 관계된 어떤 힌트를 지니고 있다.
반드시 인간만은 아니다. 예를 들면 그 집의 개 녀석도 꼬리를 흔들며 늘 밝게 살아 있는 것만으로, 내 안에 뜨거운 마음과 거치없이 행동할 수 있는 용기를 되살려 주었다.
그때 녀석을 찾지 않았더라면 나는 평생 후회했으리라. 그때 내 인생은 무엇을 중요시하고 어느 쪽을 취해야 할지 큰 기로 앞에 있었고, 나는 녀석을 찾는 쪽을 택했다. 그럴 수 있었던 것은 지친 나를 대가 없이 위로해 준 녀석에게 인간에게 느끼는 것과 똑같은 고마움을 느겼고, 또 그것을 갚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123. 여행지에서 사람은 곧잘 어린아이로 돌아간다.
육체적이거나 현실적인 피로가 아니라 여유 이쎅 피로해지면 독특한 감각이 싹튼다. 세계가 지금까지 생각했던 것과 전혀 다르게 보이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어린아이로 돌아가 새로 체험하는 수밖에 없다.

125. 내가 어떤 생각을 갖고 있고, 어떤 일을 하고 싶고 어떤 일은 하기 싫은지, 어떤 곳에 살고 싶고, 어떤 것을 꺼리는지... 동식물들이 준 진정한 애정이 지금까지 깨닫지 못했던 그런 부분을 비추어, 내가 부모에게 무엇을 물려받은 어떤 인간인지를 확실하게 파악했던 것 같다.

126. 가게에서 쓰러져 병원으로 실려 갔을 때, 과로라는 진단을 받고 링거주사를 맞고 집으로 돌아온 나는 전화를 걸 곳이 없닫는 것에 무척 놀랐다.

127. 나는 그때, 도라에몽과 타임머신과 늘 함께 있어 주는 로봇.. 그런 얘기들을 지어낸 사람들의 깊은 고독을 상상했다. 이제는 영원히 걸 수 없는 전화. 두 번 다시 들을 수 없는 그리운 목소리. 그 외로움을 해결해 줄 도구와 영원히 죽지 않고 함께 있어 주는 친구를 만들어 낼 수 밖에 없는 인간의 보편적인 슬픔을 절실하게 느꼈다.
그때 내가 원했던 것은 휴가도 약도 아니었다. 나고 자란 해변의 낡은 집 현관 안쪽, 좁다란 거실에 늘 쓰레기처럼 놓여 있던 전화기뿐이었다. 해지고 먼지 냄새 나는 소파와 잡지, 정체 모를 박스들에 금방에라도 묻혀 버릴 것 같던 그 전화기로, 나는 어떻게든 전화를 걸고 싶었다.
그 전화기가 울리는 광경을 상상하자 아주 감미롭고 푸근한 느낌이 들었고, 어쩐지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위로가 되었다.
만약 엄마가 그 전화를 받았다면 나는 또 퉁명스럽게 말했으리라.  "일하다 쓰러졌어. 과로래." 그리고 엄마는 이렇게 답하리라. "그럼 일단 내려와. 얘기 들어 줄 테니까." 조금은 화난 목소리로.
여느 때 같은 흐물흐물한 옷을 입고, 큰 키 때문에 수화기를 덮을 듯 몸을 구부리고, 조금 짜랑짜랑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리라. 그런 상상을 했더니, 지금의 시간으로 돌아오고 싶지 않을 정도로, 그저 달콤하고 정겨웠다.
많지는 않아도 진짜 친구가 몇 명 있었다. 내 고집과 어눌한 감정 표현까지 모두 헤아리고 갖가지 친절한 말을 해 주는 친구들이.
하지만 결국 친구로는 부족하다. 친구들은 말과 행동과 자세로 위로해 주지만, 그런 때에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때로는 내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조차 알아차리지 못하는 가족이 있어야 한다. 서로의 몸 냄새와 일상의 리듬을 알고 있고, 피부로 서로를 이해하면서도 무심한..
그런 사람들이 있는 공간에 몸을 담고 싶었다.

162. 난 식물과 동물이 많은 곳에서 살고 싶어요. 아이도 좋아하지만 가능하면 내 아이를 키우고 싶고. 조그만 집이라도 상관없으니까 내 세계에서 살고 싶어요. 아내와,  일과, 사랑과, 그 사이에서 생겨난 아이를 소중하게 여기면서 살아가고 싶은 거죠.

181. 진심으로 서로에게 이끌린 남자와 여자가, 언뜻 복잡해 보여도 실은 그렇지 않은 상황에서 함께 살아가기로 결정했다면, 가네야마 씨가 한 얘기와 그리 다르지 않은 결말을 맞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문젯거리는 많다. 하지만 핵심에 있는 진정한 모습을 알아볼 수만 있다면.. 나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고개를 들고 다시 한번 별을 보았다.

182. 아침의 청결한 빛속에서 바다와 공기 모두 맑게 반짝였다. 시원한 바람이 아직 잠기운이 남아 있는 얼굴을 기분 좋게 스치고 지나갔다.

183. 돌아가면 일본은 포근한 봄이리라. 나는 곧바로 가게로 돌아가고, 집에는 고양이가 있고, 오래도록 이어질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리라. 모든 것이 놀라울 정도로 그렇게 한꺼번에 변화했다. 그리고 지금 내 눈앞에는 무지개가 있다.


Friday, June 13, 2014

에쿠니 가오리- 울 준비는 되어 있다: 2014. 6. 14

20. 문제는, 하고 손목 시계를 힐끗 보면셔 야요이는 생각한다. 문제는, 고양이의 소재가 아니다. 그것이 거짓말이라고, 확신할 수 없다는 것. 과거의 자신이었다면, 그 사람이 그런 짓을 할 리 없다고 생각했을 텐데.

50. 우리에게는 항상 '지금'밖에 없다.

70. 이제 그만 집에 돌아가고 싶었다. 결혼도 결혼 생활 얘기도 그만 하고 싶었다. 얘기하면 얘기할수록 난감해진다. 나는 도로에서 본 우리 집의 외관과 현관에 한 걸음 들어섰을 때의 분위기, 슬리퍼와 잠옷과 부엌과 침실에 놓여 있는 읽다 만 책, 욕조에 물을 받을 때의 행복한 물소리와 피어오르는 김의 냄새를 떠올렸다. 커버 위에 짙은 갈색 담요가 덮여 있는 따뜻한 침대도.

97. 그것이 괜한 허세라는 것은 알고 있다. 미요코가 어떤 표정으로 걷든 아무도 상관하지 않는다. 하지만 미요코는 누군가 보고 있는 것처럼 행세한다. 누군가가, 아마도 신지가.
다다유키를 만나기 전에, 신지를 사랑했다. 학생 시절의 연애, 너무도 먼 옛 일이다. 우연히 어디선가 만난다 해도, 서로를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도 신지는 미요코의 삶의 버팀목이다. 신지를 사모해서가 아니라 신지가 곁에 있었던 때의 젊은 자신을 사모하는 마음 때문이다.

109. 루이는 프랑스인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이고, 나츠메보다 일곱 살 연하였다. 키는 큰데 체형은 소년처럼 호리호리하고, 그러면서 손만 유독 컸다. 그 손에 안기면- 루이는 껴안을 때 나츠메를 보호하듯, 또는 떠받치듯 한 손은 등에 다른 한 손은 뒷머리에 대고 힘을 주었다- 모든 것, 정말 이 남자의 품안에 있지 않은 모든 것이 불필요하게 여겨졌다.

115. 나는 혼자 사는 여자처럼 자유롭고, 결혼한 여자처럼 고독하다.

118. 루이와의 정사가 나츠메에게 남긴 것은 봇물이 쏟아진 듯 무수한 기억이었다. 자신이 누구의 것도 아니었던 한때의, 사랑 하나 만으로 어떻게든 인생을 꾸려 나갔던 한때의 본질적인 기억이었다.
그러나, 정사는 끝나고 말았다. 더구나 나츠메가 그것을 끝내기 전에, 모든 상황은 이미 끝나 있었다.

143. 지난 1년, 사실은 많은 일이 있었다. 하지만 손가락으로 모래를 퍼 올리면 우수수 떨어지듯, 그 일들은 있으나 없으나 마찬가지였던 것처럼 여겨진다. 요즘은, 일상이란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146. 시리아. 나라 이름의, 그 너무도 먼 울림에 나는 뭐라 대꾸하면 좋을지 순간적으로 당황한다. 모르는 것, 상상할 수 없는 것, 앞으로도 알지 못할 것, 그런 것들은 나를 늘 난감하게 한다.

148. 나는 눈을 감았다. 속눈썹 안으로 오래 전에 살았던 동네의 공기와 거리와 가게와 강과, 아름다운 초록 버드나무 가로수가 흐른다. 하지만 그것은 아주 짧은 순간이다. 눈을 뜨면 그곳은 이미 어두컴컴한 술집이고, 모두들 과거도 가족도 고향 따위도 갖고 있지 않다는 표정으로 술을 마시고 있다. 나는 가끔 불가사의하게 생각한다. 우리가 지금 여기서 술을 마시는 이 순간, 코시가 잠들어 있는 아파트, 속옷 가게가 있는 고향 동네, 시리아란 나라가 정말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을까 하고.

154. 테이블 위에 나타난 이야기는 지금 각자가 안고 있는 과거의 이야기보다 훨씬 선명하고 발랄한 색채를 띠어 간다.

163. 자유란,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는 고독한 상태를 뜻하는 말이다.

168. 어린애 같은 짓일지 몰라도, 나느 오래 전에 사랑한 남자를 지금도 사랑하고 있다. 그리고 그 남자와 함께 살았던 때의 내 모습 그대로 살고 싶다고 생각한다. 그런 상태를 고독하다 한다면, 나는 고독만세라 외치고 싶다.

170. 내 뜻에 반하여 심장이 쿵쿵거리기 시작한다. 마치 남자와 둘이서 처음 식사한 여자처럼. 다케루의 일거수일투족에, 거의 온몸의 신경이 집중된다.

177. 나의 여행은 늘 그런 식이었다. 나 스스로 갈 곳을 고르고, 내 힘으로 돈을 벌어 모으고, 혼자 여행하면서 끝내는 우울해지고 만다. 추위와 더위에 진저리를 치고, 고독을 고통스러워하고, 이런 곳에는 두 번 다시 안 온다고 다짐한다.
그런데도 일본으로 돌아와 얼마 있지 않으면, 또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 갈 곳을 정하고 돈을 모으고, 필요한 것들만 꾸려서 집을 뛰쳐나간다.

183. 우리는 행복했다. 우리는 그 누구도 상관하지 않았고, 겁나는 것도 없었다. 아니 무엇엔가 두려워하는 것만이 겁났다.
우리는 아무런 이해관계 없이 서로를 살아하고 싶었다. 또 언젠가 어느 한쪽의 마음이 변하면 무조건 용서하고 떠날 수 있으리라 믿고 싶었다.

208. 사람들이 만사에 대처하는 방식은 늘 이 세상에서 처음 있는 것이고 한 번뿐인 것이라서 놀랍도록 진지하고 극적입니다.
가령 슬픔을 통과할 때, 그 슬픔이 아무리 갑작스러운 것이라도 그 사람은 이미 울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잃기 위해서는 소유가 필요하고, 적어도 거기에 분명하게 있었다는 의심없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분명 거기에 있었겠죠.

212. 그 여자들에게 사랑과 결혼은 이미 삶을 지탱해 주는 버팀목도 자신의 전 존재를 보듬어 주는 따뜻한 울타리도 아닙니다. 그것은 다가갈수록 멀어지기에 끊임없이 희구해야 하는 꾸밍며 또 영원히 사로잡을 수 없기에 허허로운 절망의 또 다른 이름입니다.
그래서 불꽃이 제 몸을 불살라 언젠가는 싸늘한 재로 변하듯, 타오르는 사랑이란 스치고 지나가는 열병 같은 것일 뿐, 사랑의 끝에는 언제든 고독한 자기 자신만이 남는다는 비극적 진실에 울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일까요?

Sunday, June 8, 2014

에쿠니 가오리- 한낮인데 어두운 방: 2014. 6. 7

51. 이 방은 환하게 불을 켜놓으면 오히려 쓸쓸해 보인다고 존스 씨는 생각합니다.

53. 미야코 씨는 세면대를 닦으며 존스 씨를 생각합니다. 필드 워크에 나선 이후, 정신을 차려보면 어느새 그 생각에 빠져 있는 겁니다. 존스 씨가 마치 자신의 거리인 양-미야코 씨의 동네이기도 하고, 미야코 씨가 태어난 나라이기도 하지만- 깅릉ㄹ 안내해주었던 것, 하늘이며 길이며 집들이 모두 평소와 다르게 보였던 것, 고작 한 시간이었는데도 뭔가 여행 같았던 것. 하지만 그중에서도 유독 자주 생각나는 것은 헤어질 때의 상황이었습니다. 그때 내가 너무 허둥지둥 돌아서 와버린 것 아닐까. 미야코 씨는 생각하빈다. 너무 쌀쌀맞았던 것도 같고, 조금 무례했던 것도 같아. 감사의 말을 전할 때도 존스 씨 얼굴을 똑바로 보지 못했던 것을 미야코 씨는 기억합니다. 얼굴을 보면 헤어지기 힘들어질 것 같아서,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서, 하지만 가슴 설레어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므로 여하튼 빨리 집 안으로 도망쳐 들어오고 싶었던 겁니다.

54. 약간의 특별한 일은, 일단 말해버리고 나면 이전만큼 특별하지는 않은 게 돼버리니까 말이죠.

91. 멀리까지. 미야코 씨 귀에는 그 말이 특별한 울림으로 와 닿았습니다. 특별한, 그리고 자유로운 울림입니다. 자신이 살고 있는 작은 거리 안에 '먼 곳'이 있다는 것을 미야코 씨는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존스 씨와 걸으면 모든 것이 낯설고, 신선하고, 무섭도록 살아 숨쉬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도.

115. 아무 준비도 없었기 때문에 더 가보고 싶었던 것만큼은 확실합니다. 미야코 씨는 자신이 지금 특별한 시간 속에 있다고 느꼈으며, 조금이라도 망설인다면 그 특별함이 일그러져버릴 것만 같았습니다. '대중목욕탕'이라는 말은 미야코 씨에겐 유원지나 동물원과 마찬가지로 엉뚱한 말이었고, 존스 씨와 함께 있을 때면 엉뚱함은 유쾌함과 동의어였습니다.

118. 시간이 이른 탓인지 탈의실에도 여탕 안에도 달리 사람은 없었습니다. 돌아가는 상황도 그렇고, 이렇듯 낯선 장소에 와 있는 자기 자신에게 놀란 미야코 씨는 멍하니 느린 동작으로 옷을 벗었습니다. 하지만 꿈을 꾸고 있는 듯한 지금의 상황이 어쩐지 불안하면서도 동시에 갑작스러운 흥취를 불러일으켰습니다. 갑작스러운 흥취, 그리고 비현실적이라는 것에서 비롯된 홀가분함을.

119. 달리 아무도 없다는 사실이 미야코 씨를 무척 자유롭고 사치스러운 기분에 젖게 했습니다. 타일에 플라스틱 의자를 내려놓았을 때 나는 딱 소리까지도 유쾌하게 들립니다. 그득한 목욕물과 수증기의 좋은 냄새가 납니다.

바깥은 한낮의 해가 내리쬐고 먼지 섞인 후덥지근한 냄새가 났습니다. 하지만 미야코 씨에게는 그것들이 오히려 자신들의 피부에서 피어오르는 비누 냄새를 두드러지게 해주는 것처럼 생각되었습니다. 발걸음까지 아까보다 더 가볍게 느껴집니다.

132. 계단 아래, 큰 키에 호리호리한 몸매의, 생생히 살아 숨쉬는 존스 씨가 서 있습니다. 미야코 씨는 움직이기는커녕 숨을 쉬는 것조차 잊을 지경이 되었습니다. 미야코 씨 자신이 나중에 생각한 말을 빌리자면, 그것은 '기대 이상'의 기쁨이었습니다. 너무 기뻐서 눈앞에 있는 존재가 바로 믿어지지 않고, 어떻게 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습니다.

185. 자신 주변에 확고한 세계가 존재한다고 믿는 것은 착각에 불과하며, 인생을 사노라면 발밑이 흔들리거나 기존의 가치관이 무너져버리는 일을 종종 겨끽 마련입니다. 존스 씨 생각에 미야코 씨는 단지 진리를 발견한 것뿐이었습니다.

186. 확실히 나는 존스 씨와 있으면 평소 못 느끼던 것을 많이 느꼈어. 바람을, 햇살을, 새소리를. 세상의 아름다움을 느끼고 말았어. 자유를, 키득키득 웃고 싶어질 만한 비밀스러운 떨림을, 어린아이로 돌아간 듯한 마음 든든함을 느끼고 말았어. 히로짝과 있을 때에는 결코 느끼지 못하는 신선한 기분을.
내가 세상 밖으로 나와버린 건, 느끼지 말아야 할 것들을 느껴버린 탓인지도 몰라.

231. 그건 그렇고 이 집안은 그 사람이 있고 없고에 따라 전혀 다른 장소가 된다, 라고. 요리 냄새가 감도는 것만으로도 멋집니다. 요 며칠 어둡고 음울했던 히로시씨 집이, 심지어 단란함과는 하등 상관없어 보이는 복도며 세면실 같은 장소까지도 갑자기 생동감이 돌면서 따뜻해지는 것 같았습니다. 어떤 연유로 그렇게 되는지는 둘째 치고, 이 집이-요컨대 히로시 씨 자신이-미야코 씨를 필요로 하고 있다는 것만큼은 확실했습니다.

234. 급기야 미야코 씨는 기억의 홍수에 삼켜져버릴 것만 같았습니다. 그런 식으로 자신에게 집착해준 히로시 씨에 대한 애정과 고마움이 걷잡을 수 없이 밀려 올라오고, 이런 현실 앞에서는 존스 씨와의 이런저런 일들도 급속히 실체를 잃고 모호하게 여겨지기 시작합니다. 이대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으로 해 버리고 싶다는 욕구에 거의 저항하기 어려울 정도였습니다.

Jodi Picoult - Lone Wolf: 2014. 5. 15

65. Not knowing is a thousand times more horrible than facing your fear.

203. The space between you is the difference between life and death. Does he see you as a prey animal? Or does he see you as something that can injure him as he comes after you? If you can put that doubt in his mind, chances are, he will leave you be.

233. What looks cruel and heartless from one angle, might from another, actually be the only way to protect your family.

236. This is just my way of pointing out that we people who leap without looking are not stupid. We know damn well we might be headed for a fall. But we also know that sometimes, it's the only way out.

262. There are no fairy tales in the wild, no cinderella stories. The lowly wolf that seems to rise to the top of the pack was really an alpha all along.

333. The highest ranking wolf in the pack isn't the one that uses brute force. It's the one who can, and chooses not to.

437. I wonder if what makes a family a family isn't doing everything right all the time, but instead, giving a second chance to the people you love who do things wrong.

502. You know what the difference is between a dream and a goal? A plan.

Monday, April 14, 2014

위지안 - 오늘 내가 살아갈 이유: 2014. 4. 13

13. 시곗바늘은 늘 하던 일을 하는 것뿐이겠지만, 초침이 딱 한 칸 움직이는 그사이에 '끝'이 '처음'으로 변하는 건 1년에 단 한 번뿐이지 않은가. 그래, 영원한 '끝'은 없다. 끝이라 여기는 순간, 뒷면에 있던 시작이 다시 앞으로 온다. 앞뒤가 번갈아 도는 것처럼 시작과 끝도 영원히 번갈아 돈다. 참 고마운 회전이다.

16. 우리는 뭔가를 잡기 위해서는 아주 먼 곳까지 전속력으로 달려가야 한다고 믿으며, 십중팔구 그런 믿음이란 것이 '턱도 없는 신기루'에 불과하다는 진실을 끝끝내 인정하지 않으려고 한다. 엄청난 대가를 치르고서야, 혹은 모든 게 끝난 뒤에야 그보다 훨씬 값진 일을 지나쳐버렸음을 후회하곤 한다.

33. 사람은 갑작스럽게 큰 고통에 직면했을 때, 비로소 자신이 살아 있다는 사실을 생생하게 떠올리게 된다는 것을.

42. 뭔가를 이루기 위해 전속력으로 달리는 것보다, 곁에 있는 이의 손을 한 번 더 잡아보는 것이 훨씬 값진 일이라는 것을.

44. 블로그에 올린 생일 단상에서 나는 '서른 살이 여자에게 가장 좋은 시절이 아닐까 싶다'고 써놓았다. 그런대로 아름다움을 유지하면서도, 세상사와 사람들에 대한 통찰력도 생겨 가장 조화롭고 풍성한 시기라는 뜻에서였다. 튤립꽃처럼 풍성한 여자 나이 서른.

45. 정상을 향해 돌진하던 발걸음이 점점 느려지면서 주변의 꽃과 풀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숲의 향기와 산들바람에 취해 잠시 멈춰 서는 일도 일어났다. 경쟁자로 여기던 사람들이 앞서 갔는지, 아니면 뒤에서 추격해오고 있는지 따위에 구애받지 않게 되었다. 피곤하면 어디든 앉아 쉬고 가는 게 인생이라는 지혜를 조금은 깨달은 것도 같은 나이 서른. 누군가와 눈이 마주치면 미소를 보낼 줄도 아는 나이.
스무 살 때는 스스로를 아끼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오직 나만 사랑했다. 그러나 서른 즈음에는, 자신을 아낀다는 것이 값비싼 화장품 하나 사는 것처럼 간단한 일이 아니며, 오히려 다른 사람에게 관대한 태도를 취하는 것이 스스로를 아끼는 방법이라는 진실을 알게 되었다. 일단 베풀기 시작하면 자기 마음에서 흘러 넘치는 큰 사랑이 끊임없이 이어져 결국 자신에게 되돌아오는 것이니까.

47. 불리불기: 헤어지지 않고 포기하지 않는다.

49. 이제야 '나는 잘 모르겠어'라는 한마디가 얼마나 큰 자유를 가져다 주는지 알 것 같다. 병원에 누워 또 한걸음 나아간 나의 각성. '맞아. 좀 더 여유롭고 평화로워지기 위해서는 삶의 곳곳에 빈틈이 있어야 하는 거야.'

운명은 내 맘대로 바꿀 수 없지만 운명에 대한 나의 자세는 얼마든지 바꿀 수 있으니까.

58. 나는 내 꿈을 이루고 나면 사랑할 시간이 충분히 주어질 거라 여겼었다. 그러나 새싹이 자라 나무가 되기까지는 엄마 품 같은 햇빛이 늘 필요한 거였다. 내가 틀렸다.
사랑은 나중에 하는 게 아니라 지금 하는 것이었다. 살아 있는 지금 이 순간에.

65. 맞아, 유쾌하게. 마지막 그날까지 내 삶을 즐기는 거야. 남들이 뭐라고 하든.

66. 특히 엄마는 내가 줄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이라면 몰라도 당신 딸 위지안은 그렇게 허무하게 죽을 리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73. 정성이란 거창한 이벤트가 아니라 매일매일 지속되는 사소함에 있다는 것을 그때까지 나는 알지 못했다.

74. 나는 남편 맥도널드를 사랑했지만 왜 사랑했는지, 또 어떤 형태의 사랑인지는 굳이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갓 사랑을 시작했을 때에도 대단히 열렬하지 않았고, 지나치게 단조롭지도 않았다.
둘이 만나 인생을 같이 걸어가려면 사랑이 너무 적어도, 넘쳐도 좋지 않은 거야. 사랑이 적으면 '함께'라는 의미가 무색해지고, 사랑이 넘치면 자아를 잃을 숟 있기 때문이지.

사랑하는 사람의 일거수일투족에 마음이 흔들리거나, 눈에 보이지 않을 때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느낌이 들면 그건 위험한 거야. 심하ㅔㄱ 의존하고 있는 거니까. 바람직한 사랑 혹은 결혼이란, 모든 중심을 상대에게 두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중심을 잃지 않게 서로 균형을 잡아주는 거야.

78. 불같은 사랑도 좋지. 그렇지만 잔잔한 사랑도 괜찮을 것 같아. 서로 균형을 잡으면서 오래갈 수 있으니까.

86. 중요한 것은 단 하나뿐이다. 인생이라는 차가운 벌판 위에서 끝까지 손을 놓지 않는 존재, 그런 사람인가 하는 점.

91. 인생이란 아무것도 안 하면서 살기엔 너무 소중하고, 출세만을 위해 살기에는 너무 값지다. 혼자 깨어 있는 적막한 시간에 마음 깊은 곳에서 영혼의 갈채 소리를 들을 수 있을 만큼 뜻있는 삶을 살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참 좋은 인생일 것이다.

92. 개인의 가치와 공동의 사회적 가치가 합쳐진 삶이야말로 진정 '멋진 인생'이며 스스로에게 박수를 보낼 수 있을 만큼 성공한 인생이 아닐까. 내가 무엇을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는지 (개인적 목적)와 이 지구라는 행성에 어떤 도움을 주기 위해 왔는지 (사회적 목적)가 온전하게 결합되는 것이야말로 행복한 각성이 아닐까 싶다.

자기 삶의 궤적이 다른 이들에게 조금이라도 바람직한 변화를 줄 수 있다면, 이 세상을 손톱만큼이라도 더 좋게 만들 수 있다면 그것으로도 충분하리라.

96. 노르웨이 유학 중에는 끔찍할 정도로 그가 보고 싶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그가 궁금했고, 그의 사랑을 확인하고 싶었다. 한밤중에 그의 전화를 받을 때면 눈물부터 흐르기 시작해서 제대로 대화를 나눌 수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다시 돌아와 함께 지내기 시작하자 일주일도 채 안 되어 예전과 같은 관계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냥 익숙하고 편한 상태로 함께 살아가는 정도랄까. 약간은 심심하고 또 약간은 지루한 듯 상대방이 하는 일을 존중해가며 평범하게 살아갔다.

99. 하루에도 몇 번씩 '사랑받고 있음'을 확인하고 싶다면, 그것은 상대가 아닌, 자기 스스로가 흔들리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지금 문득 든다. 정말 사랑이라면 그걸 굳이 표현하지 않아도 일상에서 즐겁게 마음으로 전해지게 되는 것이니까.

101. 시간은 한번 지나가면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시간이 눈앞에서 조용히 지나가지만 우리는 그 어떤 수단을 써도 그것을 잡을 수 없다.

105. 여행을 떠나기에 적합한 시기가 따로 있는 게 아니다. 지금 나는 침대에 누워 창밖의 먼 길을 바라보고 있다. 다시 일어나 걸을 수 있다면 길이 끝나는 곳까지 쉬엄쉬엄 천천히 걸어가고 싶다. 나보다 더 긴 시간을 살아갈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싶다. 누구에게나 마찬가지라고. 시간이란, 여행을 떠날 수 있는 기회라고.

111. 우리가 '힘들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건강한 몸이 있기 때문이다. 땀 흘리며 하루를 시작하고 성취감까지 만끽할 수 있게 해준 나의 몸에 지금 뒤늦게 감사를 표하고 싶다. 그 고된 추억이 지금 생각해 보면 얼마나 큰 축복이었는지...
추억이란 게 왜 그렇게 소중한지 이제야 알 것 같다. 인생의 어느 지점에 서게 되면 누구나 아껴둔 식량처럼 추억의 보따리를 풀어 하나씩 하나씩 음미하게 된다. 그런 음미를 통해 추억의 의미를 재해석 하고 삶의 또 다른 지혜를 얻는 것이다.
나중에 더 많은 미소를 짓고 싶다면 지금 삶의 매 순간을 가득가득 채우며 살아야 할 것 같다. 앞으로 살아갈 날이 얼마나 남았든.

125. 불안과 두려움을 받아들이지 않고는 어른이 될 수 없다. 인생은 본질적으로 알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불안이나 두려움은 영원히 극복할 수 없는 것이었다.
정말 어른이 된 사람들은 자신의 그런 감정을 창피하게 생각하기보다는,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두려움이 현실화되지 않도록 세심하게 신경을 쓴다.

132. '최고'는 마음에서 다르다. 언제나 혼을 불어넣는 건, 상대를 위해주는 마음이니까. 결정적인 차이는 그 지점에서 벌어지는 것이다.

140. 불안과 두려움을 근본적으로 해소할 수는 없지만, 때로는 머리를 똑바로 쳐들고 당당히 맞서면 생각했던 만큼 위협적이지는 않다.

145. 그저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하기 위해 마음을 다하고 있다. 내 인생에는 그저 '살아 있음'이라는 목표만 남았다. 이렇게 명확하고 단순한 목표가 또 어디 있을까? 예전에 나를 움직였던 동력들은 모두 성공과 집착에 따른 것들이었다. 병이 아니었다면 여전히 그런 가치들을 좇아 부산하게 움직였을 것이다. 하지만 고맙게도 (!) 암으로 인해 그런 모든 것을 내려놓게 되었다.
그러자 모든 것이 단순해졌다. 그리고 너무도 쉽게 삶이 즐거워졌다. 나는 내 몫의 하루하루를 그저 열심히 살면 그만이다. 돈? 명예? 권련? 그런 것들은 다 갖기도 어렵고, 설령 모두 가졌다 해도 죽을 때 가져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수의에는 주머니가 없다고 하지 않았던가?
나는 그동안 불투명한 미래의 행복을 위해 수많은 '오늘'을 희생하며 살았다. 저당 잡혔던 그 무수한 '오늘'들은 영원히 돌이킬 수 없다. 
이제 나는 오늘 하루에 모든 것을 바친다. 주어진 하루를 온전히 살아내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 이제 알 것 같다. 나는 남보다 더 즐거워할 자격이 충분히 있다. 살아갈 날들이 많지 않을 테니까.

153. 인생이란 늘 이를 악물고 바쁘게 뛰어다니는 사람보다는, 좀 늦더라도 착한 마음으로 차분하게 걷는 사람에게 지름길을 열어주는지도 모른다.

157. 한 명의 은인이 나의 운명을 바꿔주는 것처럼, 한 권의 책도 나를 더 나은 사람으로 바꿔놓을 수 있다. 차이점이 있다면 은인을 만나는 것이 상당 부분 하늘의 도움인 데 비해, 책은 나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기회라는 것이 아닐까.

162. 하늘은 매일같이 이 아름다운 것들을 내게 주었지만 정작 나는 그 축복을 못 받고 있었다. 선물을 받으려면 두 손을 펼쳐야 하는데 내 손은 늘 뭔가를 꽉 쥐고 있었으니.

175. 어쩌면 병이란, 우리가 평생 살아도 깨닫지 못할 그런 사랑을 일깨워주기 위한 가장 극단적인 처방일지도 모른다.

187. 눈앞의 어려움을 어떻게 부르느냐에 따라 대처 방법은 판이하게 달라질 수 있다. 한사코 포기하거나 회피하려고 한다면 시련은 더욱 커질 것이다. 반면 그것을 온전히 치러야 할 삶의 대가로 받아들인다면, 시련이 아니라 일종의 시험이 된다.

190. 얼마나 견딜 수 있을까. 삶의 시간이 멈추는 것보다 내가 받은 사랑을 다 갚지 못할까봐, 그게 더 두렵다. 세상에 빚을 지고 싶지 않다. 사랑만 남겨두고 싶다.

195. 생각해보면, 기적은 꽤나 가까이에 있다. 다만, 우리가 그것을 발견하지 못하고 대단한 것만을 기대하기 때문에 기적으로 보이지 않을 뿐이다. 그래서 기적이 그 다음의 기적을 불러내지 못하는 것이다.

202. 세상에 혼자뿐이라는 생각이 든다면, 기억을 떠올려보라. 그 많은 손길들이 눈물을 닦아줄 것이다. 그 많은 눈들이 슬픔 아닌 다른 것을 보여줄 것이다. 그 많은 이야기들이 허전했던 가슴을 채워줄 것이다.

207. 상상도 못할 아픔과 바닥이 없는 공포, 여기에 목숨을 거는 모성(임신에서 출산까지의 모든 과정이 위험천만이다)으로 인해 당신은 비로소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한 감동의 드라마가 아닐까.
그런 감동의 드라마를 만들며 태어났으니, 우리는 모두 행복해야 할 의무가 있다.

222. 먼 훗날 내가 사랑했던 모든 사람들이 나를 떠올릴 때면, '최선을 다해 남겨진 시간을 즐겁고 활기차게 살았다'고 고개를 끄덕여 미소 지을 수 있으면 좋겠다.

234. 운명이 나에게서 모든 것을 앗아간다 해도, 결코 빼앗지 못할 단 한가지가 있다. 그건 바로 '선택의 권리'일 것이다.

278. 사람이 잘 살아간다는 것은 누군가의 마음에 씨앗을 심는 일인 것 같다. 어떤 씨앗은 내가 심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어버린 뒤에도 쑥쑥 자라나 커다란 나무가 되기도 한다.


Thursday, January 2, 2014

에쿠니 가오리, 츠지 히토나리- 사람을 꽃보다 아름답게 하는 사랑: 2014. 1. 2

18. 나를 잃어버리는 것이 연애이고, 사랑이란 그 반대로 자신의 모습이 또렷이 보이는 상태.

아마도 연애를 하면 냉정함을 잃어버리고 마는 그런 느낌이 좋았던 모양입니다.

19. 즉, 연애란 자기를 잃어버렸다는 것조차 인식할 수 없을 정도로 눈이 멀어버리는 현상입니다. 잘 안다는 것이 전혀 모른다는 것과 비슷하듯...

28. 지난번에 어떤 여성지의 인터뷰에서 연애는 하고 싶은데 하지 못하는 여자들이 많다는 얘기가 나왔어요, 이해할 수가 없더군요. 나는 연애를 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그 남자를 원합니다. 그 남자, 그 사람을 좋아하죠. 그래서 그 사람을 잃고 싶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어쩌면 관찰자로서 연애를 좋아하는 것이고, 실천적으로는 남자를 좋아하는 것인지도 모르겠군요.

41. 공허함에 빠진 사람은 그가 진정 무엇을 원하는지 모를 뿐만 아니라 자신의 존재 자체가 텅 비어 있는 듯한 느낌을 가집니다. 그러므로 나는 미래에 희망을 느껴 본 적이 없습니다.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두렵고 불안한 나날들이었습니다. 거기서 벗어나기 위해 나는 어떤 생각을 했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데서,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자고.

42. 미래를 믿지 않고 늘 영원한 현재만을 바라보며 살아가자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사랑에 대한 경험이나 동경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보다는 벼락이 치는 듯한 그 순간을 소중히 여기는 연애로 살아가는 길에 더 이끌렸던 것입니다.

44. 성격이 다르다고 결혼 못할 것도 없습니다. 인간이란 제각기 성격이 다르지 않습니까. 성격이 다른 건 너무도 당연합니다. 이혼의 진짜 이유는 두 사람 사이의 애정이나 연정이 현실 생활에 밀려 없어지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46. 연애를 하려면 겨울 하늘에서 작열하는 불꽃처럼 격렬하면서도 찰나적인 것이 가장 좋고, 사랑은 무상의 사랑이 가장 좋습니다. 연애에는 어딘지 모르게 이해타산의 감정이 깔려 있기에 더욱이 한번 불이 붙었다 하면 높고 찬란하게 활활 타오를 수 있지만, 무상의 사랑에는 이해타산 같은 불순물이 없는 만큼 어떤 고난과 고통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이해타산으로 사랑을 가늠한다면 참 고단한 일이겠지요.

47. 연애는 입구로 들어가거나 계단을 오르는 것처럼 규칙적인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연애를 시작하면서 모든 사람이 공통 개념에 사로잡혀 무의식적으로 자기가 그 개념에 어떤 식으로 대처해야 하는지를 생각하는 것은 위험한 일 아닐까요. 그런 공통 개념 같은 것은 하나도 없잖아요. 질서도 규칙도 자기와 상대 사이에만 있는 거잖아요.

50. '외톨이'라고 혹은 '나 스스로 해야지.' 하고 굳이 생각하지 않아도 실제로는 모두들 혼자예요. 그래서 어쩔 줄 모르죠, 그 어쩔 줄 모름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아무튼 자기 의지로 나아갈 수밖에 없으니까 거기서 중요한 것은 추상적인 정보를 근거로 행동할 것인가, 스스로 결정하여 행동할 것인가입니다. 그 길에 레일은 없어요. 어떤 문제가 생길 때마다 어린아이처럼 어쩔 줄 모르게 되지만 '저 쪽이 앞' 이라는 믿음이 어디서 온 거지? 란 물음을 끝까지 놓고 싶지 않아요, 난.

52. 어른이 되기를 정말 잘했다고 생각해요. 내가 '어른이 된다'고 말할 때 그건 황무지에 서는 것을 의미해요. 황무지에 서 있으면 다른 사람과 비교할 거리가 없지요. 그럼 불행도 없고요. 그래서 어른이 된 나는 이렇게 태평하게 있을 수 있는 거예요.

53. 그 무렵 2년제 대학을 졸업한 나는 다니고 싶은 회사를 찾을 수가 없었어요. 정말 어째야 좋을지 몰랐죠. 다들 어떻게 회사를 정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어요. 회사에 들어가 뭘 할지도 모르면서 왜 다들 회사에 들어가는지 의문이었죠.

68. '아니에요, 당신은 자유예요.' 라고 말하는 것을 고상하다 여기지 않아요. 당연하잖아요. '나는 이렇게 당신을 사랑한다. 그러니까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당신이 내 곁에 없어도 괜찮다. 어디에 있든 당신을 사랑한다.' 라고 말하고 싶지 않아요. 그러나 솔직하게 사실대로 말하자면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아무것도 바라지 않지요. 물론 부담이 되고 싶지도 않고 그 사람이 그 사람답게 있어 주는 것이 고맙죠.
하지만 싫어요, 다른 사람을 보거나 다른 곳으로 가버리면 싫어요. '우리는 이미 만났으니까, 다른 사람은 보지 말아요.' 라고 말하고 싶어요. 안 그래요? 그렇게 바보가 될 수 있다는 점이 연애의 미덕이잖아요.

69. 사랑함에 준다는 것과 빼앗는다는 것은 동의어가 아닐까 싶어요. 그러니까 사랑이란 폭력적이죠. 무언가를 바라는 편이 겸허하고 친절한 것 아닐까 라고도 생각해요. 바랄 수 있으면 상대는 그에 대답하든지 안핟느지 선택할 수 있지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사랑에 빠졌다면 상대방은 어떻게도 할 수 없어요. 그야말로 극단적인 폭력이죠. 보상이 없는 무상의 사랑 따위, 나는 전혀 고상하게 여기지 않아요.

75. 안녕, 언젠가
인간은 늘 안녕을 준비하며 살아가야 하는 거야
고독이란 절대로 배신하지 않는 친구라고 생각하는 게 좋아
사랑 앞에서 몸을 떨기 전에, 우산을 사야 해
아무리 뜨거운 사랑 앞이라도 행복을 믿어서는 안 돼
죽을 만큼 사랑해도 절대로 너무 사랑한다고 해서는 안 되는 거야

사랑이란 계절과도 같은 것
그냥 찾아와서 인생을 지겹지 않게 치장할 뿐인 것
사랑이라고 부르는 순간, 스르르 녹아버리는 얼음 조각

안녕, 언젠가

영원한 행복이 없듯이
영원한 불행도 없는 거야
언젠가 안녕이 찾아오고, 또 언젠가 만남이 찾아오느니
인간은 죽을 때, 사랑받은 기억을 떠올리는 사람과
사랑한 기억을 떠올리는 사람이 있는 거야

난 사랑한 기억을 떠올리고 싶어

85. '사랑이 점점 정으로 바뀌는 법이지.' 또는 '새삼스럽게 무슨 사랑.' '남세스럽다.' 면서 사랑없이 그토록 오랜 시간을 살아가는 경우 물론 평화로운 정의 나날일 수는 있겠지만 사랑을 잃은 대신 얻은 정이라 생각하면 너무 서글프잖아요.
내가 싫은 것은 그것을 '종착점'으로 삼는 풍조. 앞에서 황무지에 대해 얘기했는데 질서가 있고 규칙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연애에서 시작해 사랑을 키우고, 정으로 바뀌고... 그러다 보면 '사랑 없는 정'을 종착점으로 여기게 되잖아요. 사랑이 없다 또는 사랑이 식었다고 해서 정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에요. 다만, 그것이 종착점이라고 정해진 것도 아니잖아요? 조그만 소리로 투덜거리는 거예요, 난. 사랑이 성숙한다느니, 안정을 얻어간다느니, 그런 것 자체가 아무 근거도 없는데 말이에요.

103. 세상은 넓고 끝이 없습니다. 그러나 운명적인 만남이란 것은 의외로 가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카나리아가 발견한 한 장의 광고지 속에 모든 것이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카나리아를 찾습니다."

106. 어떤 사람이든, 어떤 연애든, 어떤 상황이든, 온 세계와 온 우주에 비교한다면 새장입니다. 하지만, 나올 필요가 없어요, 거기에 모든 것이 있으니까. 그것이 바로 연애의 본질. 그 장소에서 세계를 발견하는 것이 연애이고, 어떤 사람이 지금까지 전 인생을 바쳐 쌓아온 세계 밖으로 뛰쳐나가는 것이 연애입니다.

109. 문제는 지배당하는 데 만족하는 사람이죠. 즉 지배당하는 것 자체를 기분 좋게 생각하고, 조용히 내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는 사람은 어딘지 모르게 좀... 나만의 존재가 되어 주기를 원하기에 속박하는 것인데 이상하게도 속박을 즐거워하는 사람은 싫습니다. 세상에 이런 모순이! 속박당하고 있을 때도, 늘 속박에서 벗어나 은밀히 자유롭고 싶어하는 사람이 좋습니다. 이 '은밀히'라는 것이 중요합니다. 노골적으로 '나는 자유롭고 싶어.'하고 말하면 멋이 없지 않습니까. 어느 날 문득 어디론가 가버릴 것처럼 아슬아슬해 보이면서도 일부로 속박을 즐거워하는 척 가장하는 '교활한' 여자가 좋습니다.

110. 이런 구제할 길 없는 남자를 멋지게 조종할 수 있는 여자에게 나는 동경과 매력을 느낍니다. 잘난 척하는 남자를 잘 다루는 가장 좋은 방법은 늘 자신의 본심을 드러내지 않고 상대가 가진 이기주의의 힘을 이용하여 가능한 한 유리한 게임을 진행시킬 정도의 여유를 가지는 것이 아닐까요. 그리고 진정한 사랑은 아껴가면서 드러내야 합니다. 다만, 절실한 순간에 그것을 드러내는 거지요. 그런 여자 앞이만 난 이미 끝장이라고 해야겠지요. 지배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지배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114. 누군가의 여자란 자각은 속박당하고 있다는 자각일 수도 있지요. 그의 소유물이란 믿음. 그 사람의 일부, 그 사람 것이고 싶으니까. 이런 긍정적인 속박도 있어요. 사전적인 뜻에는 갇힌다, 묶인다는 부정적인 면밖에 없지만 긍정적으로 풀이하면 그 사람의 품안에 있다, 그사람의 영향이 미치는 범위 안에 있다는 뜻이니까, 바라 마지않는 일이죠.

122. 꽃은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한 순간입니다. 자신의 청춘을 그런 꽃과 똑같이 생각하고, 이미 꽃은 저버렸으니 이제 늙어갈 따름이라고 체념해 버립니다. 이 체념이 위험한 것입니다.
인간은 꽃이 아닙니다. 젊음이 만들어 내는 아름다움이 아니면 아름다울 수 없는 그런 존재가 아닙니다. 왜 꽃이 아닌 돌이라는 생각은 해보지 않을까요. 갈면 갈수록 아름다워지는 흑요석이나 수정, 다이아몬드에 자신의 모습을 비유해 보지 않을까요.

123. 그 할머니는 명랑하고 낙천적이며 싹싹한 성격을 가졌고 아직 자신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 점이 중요하지 않을까요. 마지막 순간까지 인생을 버리지 않으면 저절로 아름다워지고 사랑도 할 수 있지 않을까요.
'무엇을 배우고, 누구를 만나고, 어떤 사랑을 해왔는가.'라는 과정이야 말로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125. 나는 몇 살까지는 살고 싶지만 당장 죽어도 상관은 없어요. 당장 죽어도 좋고, 오래오래 살아도 좋고.

128. '보이고 싶은 자기'란 연기거나 연출이어도 상관없다는 생각마저 들어요.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내게 보이는 모습은 즉 그가 내게 보이고 싶어하는 모습이라고 이해하니까. 뭐 그런 모습을 내가 좋아하니까 사랑에 빠지는 것이죠.
그 사람을 좋아한다는 것은 그 사람이 표출한 것을 좋다고 평가하는 것과 마찬가지니까 나는 그것들을 믿어요. 설령 그것이 가장된 모습이었다 해도 그가 나를 위해 만들어 낸 모습이니까 상관없어요. 내게 진실은 어디까지나 하나니까.

143. 에너지는 소비하지 않으면 축적되지 않는다. ... 에너지가 부족하다고 느껴질 때, 마냥 쉬고만 있어 봐야 회복되지 않는다.
성가시고 귀찮아도 사람을 만나고 일을 하고 맛있는 것을 먹으러 나가지 않으면 에너지는 얻을 수 없어요. 연애를 하려면 에너지가 필요하죠, 그런데 연애는 하면 할수록 새로운 에너지를 생산해요.

194. '나는, 인간이 가장 사랑을 느끼는 때는 사랑 그 자체를 느끼는 때보다 과거의 기억 속에서 사랑을 끄집어 내는 때라고 생각합니다.' 당신의 이 말, 충분히 이해할 수 있어요. 연애뿐만 아니라 많은 일에 그런 면이 있지요. 끝나고 나서야 분명해지는 것이. 난 소설을 쓸 때 그런 생각을 해요. 쓰고 나서야 비로소 정착하는 것이 있지요.
'사랑의 곤란함은 정말 사랑받고 있을 때 또는 정말 사랑하고 있을 때 분노나 욕망에 눈이 멀어 사랑의 깊은 부분을 미처 보지 못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201. 결혼한 상대가 있음에도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을 불륜이라고 ㅎ나다면, 그것은 약속을 깨뜨린 것이 아니라 사랑이 다른 곳으로 이행했다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리 굳은 약속을 했다 한들 상대에게 달리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이미 마음이 떠난 사람에게 왜 약속을 어기느냐고 구속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아마도 내 사랑이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자책할 것입니다.

202. 결혼을 하고도 적당히 사랑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미 사랑하지 않는데 여기저기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데도, 아내나 남편이나 달리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데도 부부로서 연기를 하는 그런 세계. 그렇게 적당히 사랑하는 편이 풍파도 일지 않을 테니 편안하긴 할 겁니다.

216. 다만, 내가 여기서 사랑의 고통을 끌어안고 있는 사람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사랑은 홀로 설 때 비로소 공존도 지속도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홀로서기가 중요합니다. 서로 사랑하는 두 사람이 제각기 홀로 설 때, 비로소 그 사랑은 완성되기 때문이지요.

225. 어느 사랑을 선택하든 자신에게 거짓이 없다면, 최종적으로는 모든 것을 납득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236. 나는 배신당하는 것도 인생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나를 배신한 인간은 신이 내 인생을 위해 보내 준 교육자라고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을 용서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245. 인간은 고독 속에 살고, 고독 속에 죽는 존재가 아닐까요.
친구는 그 입구에 있고, 연인은 다음 단계에 있고, 결혼은 마지막 황무지가 될 것입니다. 최후의 황무지에 꽃이 피어 마침내 꽃의 들판이 된다면 그 사람의 일생은 가늠할 수 없을 만큼 훌륭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누구든 황무지에 꽃을 피우고 싶을 겁니다. 그런 꿈을 가지고 지금을 살아가는 것이 인간이니까요.

250. 내가 바라는 것은 내내 사이좋게 같이 있는 것, 아주 단순하죠. 그게 가장 좋아요. 자기들에게 가장 옳은 방법- 쾌적하고 자유롭고-을 우리는 우리 마음대로 정할 수 있어요.

256. 평생 손목시계를 차지 않고 살아온 나이기에, 시간이나 제도나 세간의 상식 따위에 구속된 채 마지막을 맞이하고 싶지 않습니다.

265. 이상적인 죽음이란, 죽음과 화해하는 것이며 감사하는 마음을 잊지 않는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270. 난 이 세상에 영원이 있다고, 절대 있다고 생각해요. 물론 순간적이긴 하겠지만 그 한 순간 속에 분명하게 존재한다고.

271. 충분히 사랑받았다는 사실을 인식하면서 죽고 싶어요.

276. 연애는 개념의 파괴니까, 인생을 건설적으로 뒷받침하는 사랑과는 다른 것이죠. 그 점이 재미있지 않나요. 연애에 빠지면 옷깃을 여미고 끝까지 빠지고 싶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랑을 지나 죽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