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day, June 16, 2014

요시모토 바나나- 무지개: 2014. 6. 15

14. 그리고 엄마는 새하얀 햇살 속에서 양산을 펴고 나른한 듯이 몸을 앞으로 숙였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엄마가 무슨 일이 있어도 저기서 지켜봐 줄거야,' 하고 생각하며 멀리까지 뛰어갔던 어린 시절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양산에 가려 잘 보이지 않지만 엄마는 틀림없이 웃고 있을 거야, 하고 생각했던 그 때의 독특한 느낌이 또렷하게 되살아났다.
어린 시절 안심하고 놀이에만 몰입하던 때에 곧잘 느꼈던, 짙은 색깔 꿀처럼 끈끈하고 즐거운 감정, 나는 온몸으로 그 감정을 떠올리고 조금은 괴로워졌다. 어쩜 이렇게 멀리 왔을까, 싶어서.
그때로 돌아가고 싶은 것도 아니고, 지금까지 살면서 괴로운 일만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양산을 쓰고 있는 이방인의 긴 치마 밖으로 곧게 뻗은 하얀 다리와, 새하얀 모래 위에서 너울대는 그림자를 돌아볼 때마다, 나는 몇 번이나 가슴이 메었다.

17. 눈앞에는 부예졌다가 다시 투명해지는 바다, 알록달록한 물고기들, 모래 위를 매끄럽게 스치고 지나가는 가오리가 보였고 입안에는 그 옛날의 소금 맛이 느껴졌다. 햇살이 비치면 산호의 색깔이 바뀌면서 물속에 있는 모든 것이 엷게 빛났다.
마치 꿈같다. 마치 무지개를 보는 것 같다고 나는 생각했다. 이 세계에 일곱 가지 빛깔이 모두 들어있다. 그리고 그 빛들이 서로 번지듯 가늘고 예쁜 리본 띠가 되어 한들한들 퍼져 나가는 것 같았다. 시간이 멈춰 버린 듯 고요한 세계다.
갖가지 일이 있었지만, 다시 이런 아름다운 것을 보고 있다. 살아 있는 한, 언젠가는 괴로운 일도 있으리라. 그래도 또 이렇게 아름다운 것들이 눈앞에 나타나 준다. 반드시.

20. 하지만 그때 그 바닷속에서는 또렷히 깨인 상태였다. 주위가 갑자기 선명하게 보이고, 뜨뜻미지근한 물을 기분 좋게 피부로 느끼고, 살아 있는 것들에 에워싸여 있었다. 때맞춰 막이 오른 것처럼 세계로 들어갈 수 있었다.

햇살은 시시각각 다른 모습으로 물속을 비추고, 모래가 뭉글뭉글 피어오르고, 동네 거리에서처럼 사람과 물고기들이 오갔다.

21. 바다에서 나온 나는 햇살 아래서 몸을 말렸다. 젖은 남색 수영복이 바다 생물처럼 반들반들 빛났다. 눈부심과, 모래범벅이 된 젖은 몸과, 머리칼에서 뚝뚝 떨어지는 투명한 물. 너무도 섬세해 건드리면 생채기가 날 듯한 느낌이 반짝반짝 마음을 채웠다.

22. 아무리 멋진 순간도 반드시 변하고 만다.
그렇기에 그들은 더욱 아름다웠다. 배에 다 탈 수 없어서 단둘이 종업원의 보트에 탄 그들은 손을 꼭 맞잡고 있었다. 얼굴은 눈부시게 밝고, 머리칼은 바람에 흩날렸다. 저녁 햇살이 여유롭게 그들을 어루만졌다. 배는 수면 위로 예쁜 선을 그으며 미끄러지듯 나아갔다.

나는 무슨 일을 하든 시간이 걸린다. 아주 많이 걸린다. 햇살은 그런 나를 이 지상의 모든 것과 구별 없이, 언제까지고 기다려 줄 듯이 따스하게 비췄다.

24. 우리는 더더욱 소박하게, 사이좋게 서로를 돕고 서로에게 기대며 작은 새들처럼 오순도순 살았다.

29. 그들은 굳이 만사를 복잡하게 만들고 지나치게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 같다고 우리끼리 늘 말하곤 했다. 하기야 자연이 없고 돈은 필요하니까 어쩔 수 없겠지, 하는 어설픈 의견을 나누면서, 관광객들이 빚어내는 갖가지 드라마를 그저 남의 일처럼 바라보았다.

32. 그런 세계 속에서, 욕심 부리지 않고 가진 만큼만 사는 데 힘을 쏟고, 자연스러운 흐름을 따르면서도 갖가지로 궁리해서 절약하고 놀고, 아무튼 사람을 중심으로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것의 중요함을 나는 할머니와 엄마에게 배웠다.

33. 청결하고 탁 트여 바람이 잘 통하는 가게 안에서는 시간이 천천히 흘렀다. 아무리 바빠도 개의치 않았다.

36. 그때 예쁘게 포장되어 신칸센을 타고 나와 함께 여행하고 웃음과 기쁨과 감사의 말을 제공해 주었던 스웨터가 이제는 주인 잃은 개처럼 무료해 보였다.
'두 번 다시 그렇게 웃지 못하겠지. 누군가에게 완벽하게 의지하고, 어떤 말이든 받아 줄 걸 알고서 마음 놓고 전화하는 일도 없겠지. 이제는 모두 타인이야.'
결심하듯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 상황이 왠지 남의 일처럼 여겨졌다.
하지만 내게는 즐거운 추억이 있다. 지금은 아프지만, 언젠가는 곰삭아 야들야들해질 수많은 추억이. 백화점에서의 그 귀여운 장면도 지금은 아프고 괴로울 뿐이지만 언젠가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진주처럼 은은한 빛을 발하리라. 그런 생각이 들었을 때, 비로소 첫 눈물이 흘렀다.
하지만 언제? 그런 날이 과연 올까? 그날이 마치 영원처럼 까마득하게 느껴졌다.

42. 일본을 떠나 긴 비행 후에 국내편 경비행기로 갈아타고 처음 모레아의 조그만 공항에 도착했을 때조차, 피곤한 건지 우울한 건지 여행이 즐거운 건지 귀찮은 건지 잘 몰랐다.
남국의 햇살 속에 몸을 한껏 담그고서도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45. 그것은 부모님이 내게 가르쳐 준 것.. 살아가기 위해서는, 담담하게 일하고, 들뜨지 말고, 복잡하고 성가신 일에 휘말리지도 말고, 자기 발이 딛고 잇는 땅을 찬찬히 내려다보면서 걸아갈 것, 그리고 하루하루의 생활과 자연의 힘에서 얻은 행복과 즐거운 기억을 잊지 말 것.

67.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면 내게 세계는 아무런 수수께끼도 재미도 없는 것이 되고 만다. 관찰의 기쁨, 뜻밖의 것을 발견하는 감동도, 일하는 즐거움도, 살아 있다는 실감도 거의 없어지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게 즐거움이란 반드시 아픈 마음과 바꾸어서만 얻을 수 있는 것이었다. 세계와의 연결 고리는 수천 개가 있다. 엄마가 돌아가셔서 외톨이가 된 지금, 그 수를 한층 늘려 가고 싶었다. 그것이 내가 살아 있는 증거처럼 느껴졌다.

70. 하지만 모든 게 그렇듯 보람차게 일하는 사모님 소유인데도, 그 집 안에서 그녀가 놓치고 있는 것들의 방대함에 나는 그만 경악하고 말았다. 이는 사모님만의 문제가 아니라, 나 역시 살아가면서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많은 것들을 놓치고 있고, 그것이 바로 삶의 형태를 선택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71. 매일매일 무엇을 보고 무엇은 보지 않고 지나칠지는 취향의 문제다. 좋고 나쁜 것은 없고 어느 쪽이 보다 낫다는 것도 없었다.
하지만 내가 매일 그들에게서 얻는 것들의 방대함을 생각하면 이러면서 돈까지 받는 것이 미안할 정도였다.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은 모두 이렇게 큰 힘을 발산한다. 그들은 사람이 보살펴 주기만 기다리는 나약한 존재가 아니었다.
그것만으로도 나느 무언가를 배우고, 그들 덕분에 치유되는 느낌이었다.

83. 검은 발, 하얀 가오리. 하늘 높이 울리는 갈매기 울음 소리. 밀려왔다 밀려가는 투명한 물. 먼 하늘에는 붓으로 슬쩍 그린 듯한 하얀 구름이 엷게 퍼져 있고, 빛은 시시각각으로 강렬해졌다. 먹이 주는 여자는 예쁜 천으로 만든 치마를 끌어올려 미끈한 허벅지를 드러내 보이면서 물속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이따금 눈이 부신 듯 손으로 햇살을 가리며 파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84. 어제 내다 넌 ㅃ라래는 보송보송 말랐을 테니까 걷어서 갤 테고, 내일도 없고, 미래도 없고, 오늘만 있는 생활이었다.
그런 단순한 생활이야말로 내가 꿈꾸는 생활이었다.
때로 갖가지 추억이 찾아오고 사소한 놀람을 선사해주는, 그런 생활을 좋아했다.

85. 옛날, 가족끼리 기슈 해변을 따라 달릴 때의 일이다. 그 때 오후의 항구 마을을 몇 군데나 지나면서 그 밝고 고요한 분위기에 놀랐다. 물리저긍로만 고요한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시간이 겹쳐 있는 듯했다. 고대로부터 이어지는, 대지와 바다가 은닉하고 있는 웅대한 시간의 흐름..
쏟아지는 빛은 모든 풍경에 미묘한 그림자르 드리우고, 파도가 잔잔한 만은 오후 속에서 미끄러지듯 살랑살랑 움직였다. 짙은 초록색 물이 가득해서 금망에라도 넘쳐흐를 듯 보였다. 동그스름한 산을 빼곡 채운 풍셩한 초록 역시 넘쳐흐를 듯 산을 뒤덮고 있었다. 그리고 짙은 파란색 하늘이 반짝반짝 빛났다. 항구는 고요했다. 낡은 배와 어망이 콘크리트 제방에 선명한 그림자를 늘어뜨리고 있었다.
자신이 어느 시대, 어느 나라에 있는지도 모를 만큼 아득한 기분이었다. 차 속에는 낮게 음악이 흐르고, 에어컨은 딱 적당한 온도로 시우너한 공기를 뿜어 냈다. 그리고 강렬한 햇살이 내 왼팔을 비추고 있었다. 솜털이 금색으로 빛나고, 피부가 하얗게 보였다.

88. 비록 역사는 짧아도, 사랑온 길 위에는 무수한 추억이 있고, 추억 속에는 이제 만날 일 없는 아빠도 살아 있다. 그렇게 생각하자 기뻤다.

101. 그런데 그 침묵이 조금도 싫지 않았다. 공기 속에서 반짝반짝 빛나는 시간의 알갱이가 보이는 듯한, 맛있는 공기를 한껏 들이마셔 폐 안이 아름다운 것으로 차오르는 듯한, 그런 맛깔나고 풍요로운 침묵이었다.

112. 저녁나절, 바에 가거나 베란다에엇 알코올 한 잔을 마실 때면 시간이 아주 기게 늘어난 것처럼 느껴지고, 한없이 오래 여기 머물 수 있으리라는 기분이 들었다.

122. 이런 때에 불쑥 나타나 인생에 빛을 선사해 주는 존재를, 나는 천사 같다고 생각한다. 잘 모르는 사람인데도 인연이 닿아 잠시지만 깊은 시간을 공유하게 되는 존재를 간혹 만난다. 그런 사람들은 그때의 삶에 관계된 어떤 힌트를 지니고 있다.
반드시 인간만은 아니다. 예를 들면 그 집의 개 녀석도 꼬리를 흔들며 늘 밝게 살아 있는 것만으로, 내 안에 뜨거운 마음과 거치없이 행동할 수 있는 용기를 되살려 주었다.
그때 녀석을 찾지 않았더라면 나는 평생 후회했으리라. 그때 내 인생은 무엇을 중요시하고 어느 쪽을 취해야 할지 큰 기로 앞에 있었고, 나는 녀석을 찾는 쪽을 택했다. 그럴 수 있었던 것은 지친 나를 대가 없이 위로해 준 녀석에게 인간에게 느끼는 것과 똑같은 고마움을 느겼고, 또 그것을 갚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123. 여행지에서 사람은 곧잘 어린아이로 돌아간다.
육체적이거나 현실적인 피로가 아니라 여유 이쎅 피로해지면 독특한 감각이 싹튼다. 세계가 지금까지 생각했던 것과 전혀 다르게 보이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어린아이로 돌아가 새로 체험하는 수밖에 없다.

125. 내가 어떤 생각을 갖고 있고, 어떤 일을 하고 싶고 어떤 일은 하기 싫은지, 어떤 곳에 살고 싶고, 어떤 것을 꺼리는지... 동식물들이 준 진정한 애정이 지금까지 깨닫지 못했던 그런 부분을 비추어, 내가 부모에게 무엇을 물려받은 어떤 인간인지를 확실하게 파악했던 것 같다.

126. 가게에서 쓰러져 병원으로 실려 갔을 때, 과로라는 진단을 받고 링거주사를 맞고 집으로 돌아온 나는 전화를 걸 곳이 없닫는 것에 무척 놀랐다.

127. 나는 그때, 도라에몽과 타임머신과 늘 함께 있어 주는 로봇.. 그런 얘기들을 지어낸 사람들의 깊은 고독을 상상했다. 이제는 영원히 걸 수 없는 전화. 두 번 다시 들을 수 없는 그리운 목소리. 그 외로움을 해결해 줄 도구와 영원히 죽지 않고 함께 있어 주는 친구를 만들어 낼 수 밖에 없는 인간의 보편적인 슬픔을 절실하게 느꼈다.
그때 내가 원했던 것은 휴가도 약도 아니었다. 나고 자란 해변의 낡은 집 현관 안쪽, 좁다란 거실에 늘 쓰레기처럼 놓여 있던 전화기뿐이었다. 해지고 먼지 냄새 나는 소파와 잡지, 정체 모를 박스들에 금방에라도 묻혀 버릴 것 같던 그 전화기로, 나는 어떻게든 전화를 걸고 싶었다.
그 전화기가 울리는 광경을 상상하자 아주 감미롭고 푸근한 느낌이 들었고, 어쩐지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위로가 되었다.
만약 엄마가 그 전화를 받았다면 나는 또 퉁명스럽게 말했으리라.  "일하다 쓰러졌어. 과로래." 그리고 엄마는 이렇게 답하리라. "그럼 일단 내려와. 얘기 들어 줄 테니까." 조금은 화난 목소리로.
여느 때 같은 흐물흐물한 옷을 입고, 큰 키 때문에 수화기를 덮을 듯 몸을 구부리고, 조금 짜랑짜랑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리라. 그런 상상을 했더니, 지금의 시간으로 돌아오고 싶지 않을 정도로, 그저 달콤하고 정겨웠다.
많지는 않아도 진짜 친구가 몇 명 있었다. 내 고집과 어눌한 감정 표현까지 모두 헤아리고 갖가지 친절한 말을 해 주는 친구들이.
하지만 결국 친구로는 부족하다. 친구들은 말과 행동과 자세로 위로해 주지만, 그런 때에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때로는 내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조차 알아차리지 못하는 가족이 있어야 한다. 서로의 몸 냄새와 일상의 리듬을 알고 있고, 피부로 서로를 이해하면서도 무심한..
그런 사람들이 있는 공간에 몸을 담고 싶었다.

162. 난 식물과 동물이 많은 곳에서 살고 싶어요. 아이도 좋아하지만 가능하면 내 아이를 키우고 싶고. 조그만 집이라도 상관없으니까 내 세계에서 살고 싶어요. 아내와,  일과, 사랑과, 그 사이에서 생겨난 아이를 소중하게 여기면서 살아가고 싶은 거죠.

181. 진심으로 서로에게 이끌린 남자와 여자가, 언뜻 복잡해 보여도 실은 그렇지 않은 상황에서 함께 살아가기로 결정했다면, 가네야마 씨가 한 얘기와 그리 다르지 않은 결말을 맞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문젯거리는 많다. 하지만 핵심에 있는 진정한 모습을 알아볼 수만 있다면.. 나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고개를 들고 다시 한번 별을 보았다.

182. 아침의 청결한 빛속에서 바다와 공기 모두 맑게 반짝였다. 시원한 바람이 아직 잠기운이 남아 있는 얼굴을 기분 좋게 스치고 지나갔다.

183. 돌아가면 일본은 포근한 봄이리라. 나는 곧바로 가게로 돌아가고, 집에는 고양이가 있고, 오래도록 이어질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리라. 모든 것이 놀라울 정도로 그렇게 한꺼번에 변화했다. 그리고 지금 내 눈앞에는 무지개가 있다.


Friday, June 13, 2014

에쿠니 가오리- 울 준비는 되어 있다: 2014. 6. 14

20. 문제는, 하고 손목 시계를 힐끗 보면셔 야요이는 생각한다. 문제는, 고양이의 소재가 아니다. 그것이 거짓말이라고, 확신할 수 없다는 것. 과거의 자신이었다면, 그 사람이 그런 짓을 할 리 없다고 생각했을 텐데.

50. 우리에게는 항상 '지금'밖에 없다.

70. 이제 그만 집에 돌아가고 싶었다. 결혼도 결혼 생활 얘기도 그만 하고 싶었다. 얘기하면 얘기할수록 난감해진다. 나는 도로에서 본 우리 집의 외관과 현관에 한 걸음 들어섰을 때의 분위기, 슬리퍼와 잠옷과 부엌과 침실에 놓여 있는 읽다 만 책, 욕조에 물을 받을 때의 행복한 물소리와 피어오르는 김의 냄새를 떠올렸다. 커버 위에 짙은 갈색 담요가 덮여 있는 따뜻한 침대도.

97. 그것이 괜한 허세라는 것은 알고 있다. 미요코가 어떤 표정으로 걷든 아무도 상관하지 않는다. 하지만 미요코는 누군가 보고 있는 것처럼 행세한다. 누군가가, 아마도 신지가.
다다유키를 만나기 전에, 신지를 사랑했다. 학생 시절의 연애, 너무도 먼 옛 일이다. 우연히 어디선가 만난다 해도, 서로를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도 신지는 미요코의 삶의 버팀목이다. 신지를 사모해서가 아니라 신지가 곁에 있었던 때의 젊은 자신을 사모하는 마음 때문이다.

109. 루이는 프랑스인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이고, 나츠메보다 일곱 살 연하였다. 키는 큰데 체형은 소년처럼 호리호리하고, 그러면서 손만 유독 컸다. 그 손에 안기면- 루이는 껴안을 때 나츠메를 보호하듯, 또는 떠받치듯 한 손은 등에 다른 한 손은 뒷머리에 대고 힘을 주었다- 모든 것, 정말 이 남자의 품안에 있지 않은 모든 것이 불필요하게 여겨졌다.

115. 나는 혼자 사는 여자처럼 자유롭고, 결혼한 여자처럼 고독하다.

118. 루이와의 정사가 나츠메에게 남긴 것은 봇물이 쏟아진 듯 무수한 기억이었다. 자신이 누구의 것도 아니었던 한때의, 사랑 하나 만으로 어떻게든 인생을 꾸려 나갔던 한때의 본질적인 기억이었다.
그러나, 정사는 끝나고 말았다. 더구나 나츠메가 그것을 끝내기 전에, 모든 상황은 이미 끝나 있었다.

143. 지난 1년, 사실은 많은 일이 있었다. 하지만 손가락으로 모래를 퍼 올리면 우수수 떨어지듯, 그 일들은 있으나 없으나 마찬가지였던 것처럼 여겨진다. 요즘은, 일상이란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146. 시리아. 나라 이름의, 그 너무도 먼 울림에 나는 뭐라 대꾸하면 좋을지 순간적으로 당황한다. 모르는 것, 상상할 수 없는 것, 앞으로도 알지 못할 것, 그런 것들은 나를 늘 난감하게 한다.

148. 나는 눈을 감았다. 속눈썹 안으로 오래 전에 살았던 동네의 공기와 거리와 가게와 강과, 아름다운 초록 버드나무 가로수가 흐른다. 하지만 그것은 아주 짧은 순간이다. 눈을 뜨면 그곳은 이미 어두컴컴한 술집이고, 모두들 과거도 가족도 고향 따위도 갖고 있지 않다는 표정으로 술을 마시고 있다. 나는 가끔 불가사의하게 생각한다. 우리가 지금 여기서 술을 마시는 이 순간, 코시가 잠들어 있는 아파트, 속옷 가게가 있는 고향 동네, 시리아란 나라가 정말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을까 하고.

154. 테이블 위에 나타난 이야기는 지금 각자가 안고 있는 과거의 이야기보다 훨씬 선명하고 발랄한 색채를 띠어 간다.

163. 자유란,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는 고독한 상태를 뜻하는 말이다.

168. 어린애 같은 짓일지 몰라도, 나느 오래 전에 사랑한 남자를 지금도 사랑하고 있다. 그리고 그 남자와 함께 살았던 때의 내 모습 그대로 살고 싶다고 생각한다. 그런 상태를 고독하다 한다면, 나는 고독만세라 외치고 싶다.

170. 내 뜻에 반하여 심장이 쿵쿵거리기 시작한다. 마치 남자와 둘이서 처음 식사한 여자처럼. 다케루의 일거수일투족에, 거의 온몸의 신경이 집중된다.

177. 나의 여행은 늘 그런 식이었다. 나 스스로 갈 곳을 고르고, 내 힘으로 돈을 벌어 모으고, 혼자 여행하면서 끝내는 우울해지고 만다. 추위와 더위에 진저리를 치고, 고독을 고통스러워하고, 이런 곳에는 두 번 다시 안 온다고 다짐한다.
그런데도 일본으로 돌아와 얼마 있지 않으면, 또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 갈 곳을 정하고 돈을 모으고, 필요한 것들만 꾸려서 집을 뛰쳐나간다.

183. 우리는 행복했다. 우리는 그 누구도 상관하지 않았고, 겁나는 것도 없었다. 아니 무엇엔가 두려워하는 것만이 겁났다.
우리는 아무런 이해관계 없이 서로를 살아하고 싶었다. 또 언젠가 어느 한쪽의 마음이 변하면 무조건 용서하고 떠날 수 있으리라 믿고 싶었다.

208. 사람들이 만사에 대처하는 방식은 늘 이 세상에서 처음 있는 것이고 한 번뿐인 것이라서 놀랍도록 진지하고 극적입니다.
가령 슬픔을 통과할 때, 그 슬픔이 아무리 갑작스러운 것이라도 그 사람은 이미 울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잃기 위해서는 소유가 필요하고, 적어도 거기에 분명하게 있었다는 의심없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분명 거기에 있었겠죠.

212. 그 여자들에게 사랑과 결혼은 이미 삶을 지탱해 주는 버팀목도 자신의 전 존재를 보듬어 주는 따뜻한 울타리도 아닙니다. 그것은 다가갈수록 멀어지기에 끊임없이 희구해야 하는 꾸밍며 또 영원히 사로잡을 수 없기에 허허로운 절망의 또 다른 이름입니다.
그래서 불꽃이 제 몸을 불살라 언젠가는 싸늘한 재로 변하듯, 타오르는 사랑이란 스치고 지나가는 열병 같은 것일 뿐, 사랑의 끝에는 언제든 고독한 자기 자신만이 남는다는 비극적 진실에 울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일까요?

Sunday, June 8, 2014

에쿠니 가오리- 한낮인데 어두운 방: 2014. 6. 7

51. 이 방은 환하게 불을 켜놓으면 오히려 쓸쓸해 보인다고 존스 씨는 생각합니다.

53. 미야코 씨는 세면대를 닦으며 존스 씨를 생각합니다. 필드 워크에 나선 이후, 정신을 차려보면 어느새 그 생각에 빠져 있는 겁니다. 존스 씨가 마치 자신의 거리인 양-미야코 씨의 동네이기도 하고, 미야코 씨가 태어난 나라이기도 하지만- 깅릉ㄹ 안내해주었던 것, 하늘이며 길이며 집들이 모두 평소와 다르게 보였던 것, 고작 한 시간이었는데도 뭔가 여행 같았던 것. 하지만 그중에서도 유독 자주 생각나는 것은 헤어질 때의 상황이었습니다. 그때 내가 너무 허둥지둥 돌아서 와버린 것 아닐까. 미야코 씨는 생각하빈다. 너무 쌀쌀맞았던 것도 같고, 조금 무례했던 것도 같아. 감사의 말을 전할 때도 존스 씨 얼굴을 똑바로 보지 못했던 것을 미야코 씨는 기억합니다. 얼굴을 보면 헤어지기 힘들어질 것 같아서,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서, 하지만 가슴 설레어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므로 여하튼 빨리 집 안으로 도망쳐 들어오고 싶었던 겁니다.

54. 약간의 특별한 일은, 일단 말해버리고 나면 이전만큼 특별하지는 않은 게 돼버리니까 말이죠.

91. 멀리까지. 미야코 씨 귀에는 그 말이 특별한 울림으로 와 닿았습니다. 특별한, 그리고 자유로운 울림입니다. 자신이 살고 있는 작은 거리 안에 '먼 곳'이 있다는 것을 미야코 씨는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존스 씨와 걸으면 모든 것이 낯설고, 신선하고, 무섭도록 살아 숨쉬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도.

115. 아무 준비도 없었기 때문에 더 가보고 싶었던 것만큼은 확실합니다. 미야코 씨는 자신이 지금 특별한 시간 속에 있다고 느꼈으며, 조금이라도 망설인다면 그 특별함이 일그러져버릴 것만 같았습니다. '대중목욕탕'이라는 말은 미야코 씨에겐 유원지나 동물원과 마찬가지로 엉뚱한 말이었고, 존스 씨와 함께 있을 때면 엉뚱함은 유쾌함과 동의어였습니다.

118. 시간이 이른 탓인지 탈의실에도 여탕 안에도 달리 사람은 없었습니다. 돌아가는 상황도 그렇고, 이렇듯 낯선 장소에 와 있는 자기 자신에게 놀란 미야코 씨는 멍하니 느린 동작으로 옷을 벗었습니다. 하지만 꿈을 꾸고 있는 듯한 지금의 상황이 어쩐지 불안하면서도 동시에 갑작스러운 흥취를 불러일으켰습니다. 갑작스러운 흥취, 그리고 비현실적이라는 것에서 비롯된 홀가분함을.

119. 달리 아무도 없다는 사실이 미야코 씨를 무척 자유롭고 사치스러운 기분에 젖게 했습니다. 타일에 플라스틱 의자를 내려놓았을 때 나는 딱 소리까지도 유쾌하게 들립니다. 그득한 목욕물과 수증기의 좋은 냄새가 납니다.

바깥은 한낮의 해가 내리쬐고 먼지 섞인 후덥지근한 냄새가 났습니다. 하지만 미야코 씨에게는 그것들이 오히려 자신들의 피부에서 피어오르는 비누 냄새를 두드러지게 해주는 것처럼 생각되었습니다. 발걸음까지 아까보다 더 가볍게 느껴집니다.

132. 계단 아래, 큰 키에 호리호리한 몸매의, 생생히 살아 숨쉬는 존스 씨가 서 있습니다. 미야코 씨는 움직이기는커녕 숨을 쉬는 것조차 잊을 지경이 되었습니다. 미야코 씨 자신이 나중에 생각한 말을 빌리자면, 그것은 '기대 이상'의 기쁨이었습니다. 너무 기뻐서 눈앞에 있는 존재가 바로 믿어지지 않고, 어떻게 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습니다.

185. 자신 주변에 확고한 세계가 존재한다고 믿는 것은 착각에 불과하며, 인생을 사노라면 발밑이 흔들리거나 기존의 가치관이 무너져버리는 일을 종종 겨끽 마련입니다. 존스 씨 생각에 미야코 씨는 단지 진리를 발견한 것뿐이었습니다.

186. 확실히 나는 존스 씨와 있으면 평소 못 느끼던 것을 많이 느꼈어. 바람을, 햇살을, 새소리를. 세상의 아름다움을 느끼고 말았어. 자유를, 키득키득 웃고 싶어질 만한 비밀스러운 떨림을, 어린아이로 돌아간 듯한 마음 든든함을 느끼고 말았어. 히로짝과 있을 때에는 결코 느끼지 못하는 신선한 기분을.
내가 세상 밖으로 나와버린 건, 느끼지 말아야 할 것들을 느껴버린 탓인지도 몰라.

231. 그건 그렇고 이 집안은 그 사람이 있고 없고에 따라 전혀 다른 장소가 된다, 라고. 요리 냄새가 감도는 것만으로도 멋집니다. 요 며칠 어둡고 음울했던 히로시씨 집이, 심지어 단란함과는 하등 상관없어 보이는 복도며 세면실 같은 장소까지도 갑자기 생동감이 돌면서 따뜻해지는 것 같았습니다. 어떤 연유로 그렇게 되는지는 둘째 치고, 이 집이-요컨대 히로시 씨 자신이-미야코 씨를 필요로 하고 있다는 것만큼은 확실했습니다.

234. 급기야 미야코 씨는 기억의 홍수에 삼켜져버릴 것만 같았습니다. 그런 식으로 자신에게 집착해준 히로시 씨에 대한 애정과 고마움이 걷잡을 수 없이 밀려 올라오고, 이런 현실 앞에서는 존스 씨와의 이런저런 일들도 급속히 실체를 잃고 모호하게 여겨지기 시작합니다. 이대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으로 해 버리고 싶다는 욕구에 거의 저항하기 어려울 정도였습니다.

Jodi Picoult - Lone Wolf: 2014. 5. 15

65. Not knowing is a thousand times more horrible than facing your fear.

203. The space between you is the difference between life and death. Does he see you as a prey animal? Or does he see you as something that can injure him as he comes after you? If you can put that doubt in his mind, chances are, he will leave you be.

233. What looks cruel and heartless from one angle, might from another, actually be the only way to protect your family.

236. This is just my way of pointing out that we people who leap without looking are not stupid. We know damn well we might be headed for a fall. But we also know that sometimes, it's the only way out.

262. There are no fairy tales in the wild, no cinderella stories. The lowly wolf that seems to rise to the top of the pack was really an alpha all along.

333. The highest ranking wolf in the pack isn't the one that uses brute force. It's the one who can, and chooses not to.

437. I wonder if what makes a family a family isn't doing everything right all the time, but instead, giving a second chance to the people you love who do things wrong.

502. You know what the difference is between a dream and a goal? A pl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