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day, June 16, 2014

요시모토 바나나- 무지개: 2014. 6. 15

14. 그리고 엄마는 새하얀 햇살 속에서 양산을 펴고 나른한 듯이 몸을 앞으로 숙였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엄마가 무슨 일이 있어도 저기서 지켜봐 줄거야,' 하고 생각하며 멀리까지 뛰어갔던 어린 시절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양산에 가려 잘 보이지 않지만 엄마는 틀림없이 웃고 있을 거야, 하고 생각했던 그 때의 독특한 느낌이 또렷하게 되살아났다.
어린 시절 안심하고 놀이에만 몰입하던 때에 곧잘 느꼈던, 짙은 색깔 꿀처럼 끈끈하고 즐거운 감정, 나는 온몸으로 그 감정을 떠올리고 조금은 괴로워졌다. 어쩜 이렇게 멀리 왔을까, 싶어서.
그때로 돌아가고 싶은 것도 아니고, 지금까지 살면서 괴로운 일만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양산을 쓰고 있는 이방인의 긴 치마 밖으로 곧게 뻗은 하얀 다리와, 새하얀 모래 위에서 너울대는 그림자를 돌아볼 때마다, 나는 몇 번이나 가슴이 메었다.

17. 눈앞에는 부예졌다가 다시 투명해지는 바다, 알록달록한 물고기들, 모래 위를 매끄럽게 스치고 지나가는 가오리가 보였고 입안에는 그 옛날의 소금 맛이 느껴졌다. 햇살이 비치면 산호의 색깔이 바뀌면서 물속에 있는 모든 것이 엷게 빛났다.
마치 꿈같다. 마치 무지개를 보는 것 같다고 나는 생각했다. 이 세계에 일곱 가지 빛깔이 모두 들어있다. 그리고 그 빛들이 서로 번지듯 가늘고 예쁜 리본 띠가 되어 한들한들 퍼져 나가는 것 같았다. 시간이 멈춰 버린 듯 고요한 세계다.
갖가지 일이 있었지만, 다시 이런 아름다운 것을 보고 있다. 살아 있는 한, 언젠가는 괴로운 일도 있으리라. 그래도 또 이렇게 아름다운 것들이 눈앞에 나타나 준다. 반드시.

20. 하지만 그때 그 바닷속에서는 또렷히 깨인 상태였다. 주위가 갑자기 선명하게 보이고, 뜨뜻미지근한 물을 기분 좋게 피부로 느끼고, 살아 있는 것들에 에워싸여 있었다. 때맞춰 막이 오른 것처럼 세계로 들어갈 수 있었다.

햇살은 시시각각 다른 모습으로 물속을 비추고, 모래가 뭉글뭉글 피어오르고, 동네 거리에서처럼 사람과 물고기들이 오갔다.

21. 바다에서 나온 나는 햇살 아래서 몸을 말렸다. 젖은 남색 수영복이 바다 생물처럼 반들반들 빛났다. 눈부심과, 모래범벅이 된 젖은 몸과, 머리칼에서 뚝뚝 떨어지는 투명한 물. 너무도 섬세해 건드리면 생채기가 날 듯한 느낌이 반짝반짝 마음을 채웠다.

22. 아무리 멋진 순간도 반드시 변하고 만다.
그렇기에 그들은 더욱 아름다웠다. 배에 다 탈 수 없어서 단둘이 종업원의 보트에 탄 그들은 손을 꼭 맞잡고 있었다. 얼굴은 눈부시게 밝고, 머리칼은 바람에 흩날렸다. 저녁 햇살이 여유롭게 그들을 어루만졌다. 배는 수면 위로 예쁜 선을 그으며 미끄러지듯 나아갔다.

나는 무슨 일을 하든 시간이 걸린다. 아주 많이 걸린다. 햇살은 그런 나를 이 지상의 모든 것과 구별 없이, 언제까지고 기다려 줄 듯이 따스하게 비췄다.

24. 우리는 더더욱 소박하게, 사이좋게 서로를 돕고 서로에게 기대며 작은 새들처럼 오순도순 살았다.

29. 그들은 굳이 만사를 복잡하게 만들고 지나치게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 같다고 우리끼리 늘 말하곤 했다. 하기야 자연이 없고 돈은 필요하니까 어쩔 수 없겠지, 하는 어설픈 의견을 나누면서, 관광객들이 빚어내는 갖가지 드라마를 그저 남의 일처럼 바라보았다.

32. 그런 세계 속에서, 욕심 부리지 않고 가진 만큼만 사는 데 힘을 쏟고, 자연스러운 흐름을 따르면서도 갖가지로 궁리해서 절약하고 놀고, 아무튼 사람을 중심으로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것의 중요함을 나는 할머니와 엄마에게 배웠다.

33. 청결하고 탁 트여 바람이 잘 통하는 가게 안에서는 시간이 천천히 흘렀다. 아무리 바빠도 개의치 않았다.

36. 그때 예쁘게 포장되어 신칸센을 타고 나와 함께 여행하고 웃음과 기쁨과 감사의 말을 제공해 주었던 스웨터가 이제는 주인 잃은 개처럼 무료해 보였다.
'두 번 다시 그렇게 웃지 못하겠지. 누군가에게 완벽하게 의지하고, 어떤 말이든 받아 줄 걸 알고서 마음 놓고 전화하는 일도 없겠지. 이제는 모두 타인이야.'
결심하듯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 상황이 왠지 남의 일처럼 여겨졌다.
하지만 내게는 즐거운 추억이 있다. 지금은 아프지만, 언젠가는 곰삭아 야들야들해질 수많은 추억이. 백화점에서의 그 귀여운 장면도 지금은 아프고 괴로울 뿐이지만 언젠가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진주처럼 은은한 빛을 발하리라. 그런 생각이 들었을 때, 비로소 첫 눈물이 흘렀다.
하지만 언제? 그런 날이 과연 올까? 그날이 마치 영원처럼 까마득하게 느껴졌다.

42. 일본을 떠나 긴 비행 후에 국내편 경비행기로 갈아타고 처음 모레아의 조그만 공항에 도착했을 때조차, 피곤한 건지 우울한 건지 여행이 즐거운 건지 귀찮은 건지 잘 몰랐다.
남국의 햇살 속에 몸을 한껏 담그고서도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45. 그것은 부모님이 내게 가르쳐 준 것.. 살아가기 위해서는, 담담하게 일하고, 들뜨지 말고, 복잡하고 성가신 일에 휘말리지도 말고, 자기 발이 딛고 잇는 땅을 찬찬히 내려다보면서 걸아갈 것, 그리고 하루하루의 생활과 자연의 힘에서 얻은 행복과 즐거운 기억을 잊지 말 것.

67.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면 내게 세계는 아무런 수수께끼도 재미도 없는 것이 되고 만다. 관찰의 기쁨, 뜻밖의 것을 발견하는 감동도, 일하는 즐거움도, 살아 있다는 실감도 거의 없어지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게 즐거움이란 반드시 아픈 마음과 바꾸어서만 얻을 수 있는 것이었다. 세계와의 연결 고리는 수천 개가 있다. 엄마가 돌아가셔서 외톨이가 된 지금, 그 수를 한층 늘려 가고 싶었다. 그것이 내가 살아 있는 증거처럼 느껴졌다.

70. 하지만 모든 게 그렇듯 보람차게 일하는 사모님 소유인데도, 그 집 안에서 그녀가 놓치고 있는 것들의 방대함에 나는 그만 경악하고 말았다. 이는 사모님만의 문제가 아니라, 나 역시 살아가면서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많은 것들을 놓치고 있고, 그것이 바로 삶의 형태를 선택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71. 매일매일 무엇을 보고 무엇은 보지 않고 지나칠지는 취향의 문제다. 좋고 나쁜 것은 없고 어느 쪽이 보다 낫다는 것도 없었다.
하지만 내가 매일 그들에게서 얻는 것들의 방대함을 생각하면 이러면서 돈까지 받는 것이 미안할 정도였다.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은 모두 이렇게 큰 힘을 발산한다. 그들은 사람이 보살펴 주기만 기다리는 나약한 존재가 아니었다.
그것만으로도 나느 무언가를 배우고, 그들 덕분에 치유되는 느낌이었다.

83. 검은 발, 하얀 가오리. 하늘 높이 울리는 갈매기 울음 소리. 밀려왔다 밀려가는 투명한 물. 먼 하늘에는 붓으로 슬쩍 그린 듯한 하얀 구름이 엷게 퍼져 있고, 빛은 시시각각으로 강렬해졌다. 먹이 주는 여자는 예쁜 천으로 만든 치마를 끌어올려 미끈한 허벅지를 드러내 보이면서 물속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이따금 눈이 부신 듯 손으로 햇살을 가리며 파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84. 어제 내다 넌 ㅃ라래는 보송보송 말랐을 테니까 걷어서 갤 테고, 내일도 없고, 미래도 없고, 오늘만 있는 생활이었다.
그런 단순한 생활이야말로 내가 꿈꾸는 생활이었다.
때로 갖가지 추억이 찾아오고 사소한 놀람을 선사해주는, 그런 생활을 좋아했다.

85. 옛날, 가족끼리 기슈 해변을 따라 달릴 때의 일이다. 그 때 오후의 항구 마을을 몇 군데나 지나면서 그 밝고 고요한 분위기에 놀랐다. 물리저긍로만 고요한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시간이 겹쳐 있는 듯했다. 고대로부터 이어지는, 대지와 바다가 은닉하고 있는 웅대한 시간의 흐름..
쏟아지는 빛은 모든 풍경에 미묘한 그림자르 드리우고, 파도가 잔잔한 만은 오후 속에서 미끄러지듯 살랑살랑 움직였다. 짙은 초록색 물이 가득해서 금망에라도 넘쳐흐를 듯 보였다. 동그스름한 산을 빼곡 채운 풍셩한 초록 역시 넘쳐흐를 듯 산을 뒤덮고 있었다. 그리고 짙은 파란색 하늘이 반짝반짝 빛났다. 항구는 고요했다. 낡은 배와 어망이 콘크리트 제방에 선명한 그림자를 늘어뜨리고 있었다.
자신이 어느 시대, 어느 나라에 있는지도 모를 만큼 아득한 기분이었다. 차 속에는 낮게 음악이 흐르고, 에어컨은 딱 적당한 온도로 시우너한 공기를 뿜어 냈다. 그리고 강렬한 햇살이 내 왼팔을 비추고 있었다. 솜털이 금색으로 빛나고, 피부가 하얗게 보였다.

88. 비록 역사는 짧아도, 사랑온 길 위에는 무수한 추억이 있고, 추억 속에는 이제 만날 일 없는 아빠도 살아 있다. 그렇게 생각하자 기뻤다.

101. 그런데 그 침묵이 조금도 싫지 않았다. 공기 속에서 반짝반짝 빛나는 시간의 알갱이가 보이는 듯한, 맛있는 공기를 한껏 들이마셔 폐 안이 아름다운 것으로 차오르는 듯한, 그런 맛깔나고 풍요로운 침묵이었다.

112. 저녁나절, 바에 가거나 베란다에엇 알코올 한 잔을 마실 때면 시간이 아주 기게 늘어난 것처럼 느껴지고, 한없이 오래 여기 머물 수 있으리라는 기분이 들었다.

122. 이런 때에 불쑥 나타나 인생에 빛을 선사해 주는 존재를, 나는 천사 같다고 생각한다. 잘 모르는 사람인데도 인연이 닿아 잠시지만 깊은 시간을 공유하게 되는 존재를 간혹 만난다. 그런 사람들은 그때의 삶에 관계된 어떤 힌트를 지니고 있다.
반드시 인간만은 아니다. 예를 들면 그 집의 개 녀석도 꼬리를 흔들며 늘 밝게 살아 있는 것만으로, 내 안에 뜨거운 마음과 거치없이 행동할 수 있는 용기를 되살려 주었다.
그때 녀석을 찾지 않았더라면 나는 평생 후회했으리라. 그때 내 인생은 무엇을 중요시하고 어느 쪽을 취해야 할지 큰 기로 앞에 있었고, 나는 녀석을 찾는 쪽을 택했다. 그럴 수 있었던 것은 지친 나를 대가 없이 위로해 준 녀석에게 인간에게 느끼는 것과 똑같은 고마움을 느겼고, 또 그것을 갚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123. 여행지에서 사람은 곧잘 어린아이로 돌아간다.
육체적이거나 현실적인 피로가 아니라 여유 이쎅 피로해지면 독특한 감각이 싹튼다. 세계가 지금까지 생각했던 것과 전혀 다르게 보이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어린아이로 돌아가 새로 체험하는 수밖에 없다.

125. 내가 어떤 생각을 갖고 있고, 어떤 일을 하고 싶고 어떤 일은 하기 싫은지, 어떤 곳에 살고 싶고, 어떤 것을 꺼리는지... 동식물들이 준 진정한 애정이 지금까지 깨닫지 못했던 그런 부분을 비추어, 내가 부모에게 무엇을 물려받은 어떤 인간인지를 확실하게 파악했던 것 같다.

126. 가게에서 쓰러져 병원으로 실려 갔을 때, 과로라는 진단을 받고 링거주사를 맞고 집으로 돌아온 나는 전화를 걸 곳이 없닫는 것에 무척 놀랐다.

127. 나는 그때, 도라에몽과 타임머신과 늘 함께 있어 주는 로봇.. 그런 얘기들을 지어낸 사람들의 깊은 고독을 상상했다. 이제는 영원히 걸 수 없는 전화. 두 번 다시 들을 수 없는 그리운 목소리. 그 외로움을 해결해 줄 도구와 영원히 죽지 않고 함께 있어 주는 친구를 만들어 낼 수 밖에 없는 인간의 보편적인 슬픔을 절실하게 느꼈다.
그때 내가 원했던 것은 휴가도 약도 아니었다. 나고 자란 해변의 낡은 집 현관 안쪽, 좁다란 거실에 늘 쓰레기처럼 놓여 있던 전화기뿐이었다. 해지고 먼지 냄새 나는 소파와 잡지, 정체 모를 박스들에 금방에라도 묻혀 버릴 것 같던 그 전화기로, 나는 어떻게든 전화를 걸고 싶었다.
그 전화기가 울리는 광경을 상상하자 아주 감미롭고 푸근한 느낌이 들었고, 어쩐지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위로가 되었다.
만약 엄마가 그 전화를 받았다면 나는 또 퉁명스럽게 말했으리라.  "일하다 쓰러졌어. 과로래." 그리고 엄마는 이렇게 답하리라. "그럼 일단 내려와. 얘기 들어 줄 테니까." 조금은 화난 목소리로.
여느 때 같은 흐물흐물한 옷을 입고, 큰 키 때문에 수화기를 덮을 듯 몸을 구부리고, 조금 짜랑짜랑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리라. 그런 상상을 했더니, 지금의 시간으로 돌아오고 싶지 않을 정도로, 그저 달콤하고 정겨웠다.
많지는 않아도 진짜 친구가 몇 명 있었다. 내 고집과 어눌한 감정 표현까지 모두 헤아리고 갖가지 친절한 말을 해 주는 친구들이.
하지만 결국 친구로는 부족하다. 친구들은 말과 행동과 자세로 위로해 주지만, 그런 때에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때로는 내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조차 알아차리지 못하는 가족이 있어야 한다. 서로의 몸 냄새와 일상의 리듬을 알고 있고, 피부로 서로를 이해하면서도 무심한..
그런 사람들이 있는 공간에 몸을 담고 싶었다.

162. 난 식물과 동물이 많은 곳에서 살고 싶어요. 아이도 좋아하지만 가능하면 내 아이를 키우고 싶고. 조그만 집이라도 상관없으니까 내 세계에서 살고 싶어요. 아내와,  일과, 사랑과, 그 사이에서 생겨난 아이를 소중하게 여기면서 살아가고 싶은 거죠.

181. 진심으로 서로에게 이끌린 남자와 여자가, 언뜻 복잡해 보여도 실은 그렇지 않은 상황에서 함께 살아가기로 결정했다면, 가네야마 씨가 한 얘기와 그리 다르지 않은 결말을 맞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문젯거리는 많다. 하지만 핵심에 있는 진정한 모습을 알아볼 수만 있다면.. 나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고개를 들고 다시 한번 별을 보았다.

182. 아침의 청결한 빛속에서 바다와 공기 모두 맑게 반짝였다. 시원한 바람이 아직 잠기운이 남아 있는 얼굴을 기분 좋게 스치고 지나갔다.

183. 돌아가면 일본은 포근한 봄이리라. 나는 곧바로 가게로 돌아가고, 집에는 고양이가 있고, 오래도록 이어질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리라. 모든 것이 놀라울 정도로 그렇게 한꺼번에 변화했다. 그리고 지금 내 눈앞에는 무지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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