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esday, December 2, 2014

요시모토 바나나- 하치의 마지막 연인: 2014. 12. 2

7. 살아 있음을 증오했던 것은 아닌데, 늘 꿈속처럼 생의 모든 장면이 멀고 뿌옇기만 했었다. 많은 것들을 아주 가깝게 느끼거나 부자연스럽게 멀리 느꼈다.
그 시절, 내가 속한 세계에서 내 귀가 알아들을 수 있고 색깔 있는 말을 하는 사람은, 안 지 얼마 안 된 하치뿐이었다.
하치랑 지내는 시간만이 유일하게, 내가 나 자신과 데이트할 수 있는 시간이기도 했다.

14. 아이들은 천국에서, 어느 엄마의 몸으로 들어갈까를 정한다는 얘기가 있다. 분홍빛, 뭉게구름 위에서 이루어진 천사의 결단이다.
그때부터 이미, 무언가가 결정되어 있는 것이다.
<불길한 일의 중심은 언제든 가정에 있다고 생각한다. 커튼은 엄마의 이미지입니다. 따스하게 감쌀 수도 있지만, 감싸 질식시킬 수도 있죠. 마찬가지로 엄마 역시 지켜줄 수도 있지만, 죽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

26. 그때부터 나는 말로 설명하지 않기로 하였다. 하염없이, 하염없이 설명하면 내 혈관으로 흐르는 피까지 알아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나의 안이함은, 실제 나이보다 늙어 보이는 내가 쓸쓸한 내 육체로부터 전 우주를 향하여 발산한 유일한 어린 마음이었다.
그때 나는 비로소 어른으로 홀로서기를 하였고, 내 혼과 사랑에 빠졌다.
단 한 순간이라도 자기 자신과 농밀한 사랑의 시간을 가질 수 있다면, 삶에 대한 증오는 사라진다.

27. 먹고 싶지 않을 때는 먹지 않고, 자고 싶지 않을 때는 자지 않는 것이 좋다. 시간은 부조리한 것, 노력한 만큼 되돌아온다는 보장은 없다. 그렇게 엉터리 같은 이 세계에서는 머리를 써서, 필요한 것만 생각하며 산다.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균형을 유지하면서 빛을 잃지 않도록 사는 거야. 그러면 거짓말 따위 접근하지 못한다.

37. 한여름의 녹음으로 무성한 길을, 잰 걸음으로 걸었다. 오래오래, 숨이 차오를 정도로, 둘이서 걷는다는 기쁨에 어질어질 현기증을 느끼면서.

39. 느닷없이, 나느 언제나 보고 있을 뿐, 이란 생각이 들었다. 보고 있을 뿐, 거기에 나 자신은 없다.

44. 진짜로 거짓말을 한 것보다 더 나쁜 것은, 자기 생각으로 타인을 움직이려 하는 것이다. 설사 좋은 뜻으로 하는 일이라도, 그리고 아무리 가볍거나 무거워도, 죄임에는 틀림이 없다. 타인의 생각이 어느 틈엔가 자기 사정에 맞게 바뀌도록 압력을 가하다니, 끔찍한 일이다.

59. 몸을 맡긴다 함은, 우선 바짝 긴장을 하고, 숨을 조이고, 그러고서 풀어냄을 뜻하는 것이었나보다.
의식하지 않으면 않을수록 그림이 잘 그려졌다.
그리하여 나는 그림을 그리는 일과, 나 자신과, 친구가 될 수 있었다. 이게 기본이었다.

63. 나는 여자 역시, 결국은 <항상 같이 있어주는 사람>을 좋아한다고 생각한다. 시장을 보러 갈 때나, 카페에서 커피를 마실 때나, 파티에 참석할 때나, 어디든.

65. 기간이 정해져 있으면, 그런 일들을 쉬 알 수 있다. 부자유스러움의 얼개를. 그리고 매사 물러날 때를 포착하는 것이 얼마나 생명을 활기 차게 해주는지를.
지금 이 영원한 상자 정원을 무너뜨릴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우리한테는 밤도 낮도 의무도 없고, 내일을 위해 지키지 않으면 안 될 약속도 없었다.
모두가 우리처럼만 살고 있다면, 얼마나.
상대방을 잘 알 수 있을 텐데. 자기 자신을 잘 알 수 있을 텐데. 친절할 수 있을 텐데.

66. 한번 안 되면, 안 된다는 생각이 눌러붙어서, 떼내기가 힘드니까, 처음 할 때의 집중이 중요해. 그리고 물론 거기에는 요령도 있지만, 말로 하면 할수록 멀어지니까, 그리고 줄어드니까, 깨달은 사람이 이러니저러니 말하지 않는 것은, 말할 수 없어서가 아니라 말하면 줄어든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야.

80. 하치는 두고두고 후회하지 않도록, 서슴없이 감정을 발산하였다. 지금의 슬픔을 지금으로 끝내기 위한, 산 테크닉이었다.

101. 모든 것이 변하는 시기가 있는 거야. 모든 일에는, 변하는, 때와 장소가 있어. 좋든 나쁘든.

123. 정말 마음에 든 사람끼리는 언제나 이런 식으로 술래잡기를 한다. 타이밍은 영원히 맞지 않는다.

124. 빛이 두 사람의 무릎에서 넘실거린다. 앞쪽에서 할머니가 끄덕끄덕 졸고 있다. 운전사 앞에는 가족 사진이 붙어 있다. 길가에 있는 수많은 여관에 한가로운 오후가 찾아들고 있다. 나무들이 빛을 품고 흔들리고 있다. 바람, 시원한, 최고의 바람.
버스가 흔들리고 있다. 빛이, 춤추고 있다.
아무쪼록 그것만으로, 이대로.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여름의, 기적의 포옹을.
둘만이서, 단둘이서.

139. 실연했는데 억지로 기운 내려 애쓰는 것은, 미처 익지도 않아 시퍼런 바나나를 레인지에 넣어 노랗게 만들려는 것이다.

145. 운명처럼 마오의 닫힌 세계의 문을 살며시 열고 나타난 하치는, 세계로 통하는 다리를 놓아주고, 그녀의 손을 잡아 알록달록 채색된 세상으로 조심조심, 소리없이 인도한다.
별하늘과 교류하고 인류의 평화를 기원하는 하치가 만들어놓은 여유롭고 자연스런 열린 공간에서, 마오는 자기 내면에 갇혀 있던 표현이 욕구를 해방시키고, 죽어 있던 시간에 회생의 숨을 불어넣는다.
이 작품에서 사랑이란 그렇게 가능한다.
자기 자신 안에 갇혀 있는 마오에게 세상으로 이어지는 다리를 놓아주고, 자기만의 언어를 깨닫게 하고, 그리고 그 존재의 기억으로 삶의 바다에 노저어 나갈 수 있게 하는 힘으로 말이다.

무레 요코- 빵과 수프, 고양이와 함께 하기 좋은 날: 2014. 12. 1

23. 선생님은 다시마로 국물을 낼 대는 물이 펄펄 끓기 전에 반드시 다시마를 건져내야 한다고 했다. 물이 끓으면서 다시마가 살랑살랑 움직이기 시작할 때라고 알기 쉽게 그 타이밍을 가르쳐주었다.

58. 가장 중요한 점은 자신의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것이다. 사람들은 금방 싫증을 낸다. 오늘은 우리 가게를 찾아주었지만 날로 바뀌는 유행을 좇아 내일은 그냥 지나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건 또 그때 생각할 문제다.

64. 아키코는 엄마를 포함해 다른 사람과 비교되는 것에 연연하지 않고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할 뿐이었다.

65. 시마 씨는 외모가 세련되거나 현대적인 분위기는 아니지만, 센스가 있는 데다 생각도 반듯하고 무엇보다 일을 잘했다. 그렇다고 일 잘하는 아르바이트생이 흔히 그렇듯, 자신이 경영자라도 된 것처럼 착각하고 말참견을 하는 일도 없었다. 과연 운동으로 단련된 사람답게 자신의 처지를 잘 파악하고, 자기가 해야 할 일과 하지 않아도 좋을 일을 분별할 줄 알았다.

70. 애당초 남이 만든 음식을 가지고 뭐라도 된 것처럼 맛이 있네 없네, 하며 평가하는 것 자체가 잘못된 거죠. 맛있는 가게를 알아보는 안목이 있으면 그만인 일인데.

116. 아키코는 가게 일을 하지 않고,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이 순간이 행복했다. 젊었을 때는 생일이나 크리스마스에 케이크를 먹거나 선물을 받는 이벤트가 즐거웠다. 하지만 나이를 이렇게 먹고 보니 일상 속의 소소한 부분에서 행복을 느끼게 됐다. 아키코는 작은 일에 행복을 느끼는 자신에게 만족하면서 머리에 따스한 햇살을 받으며 꼬박꼬박 졸고 있는 타로를 바라 보았다.

222. 시간이 슬픔을 해결해준다는 말은 거짓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더 깊어지는 슬픔도 있다. 그렇다고 그 슬픔을 잊기 위해 다른 고양이를 키울 마음은 없었다.

228. 울고 싶을 때는 마음껏 우는 것도 좋아요. 몸에서 나오고 싶어 하는 것은 내보내는 게 좋거든요.

요시모토 바나나- 아르헨티나 할머니: 2014. 11. 30

12. 외동딸인 내가 엄마의 죽음을 경험하면서 무엇을 얻었는지는 뭐라 정확하게 표현할 수 없다. 하지만 내 눈동자에 늘 깃든 어떤 빛으로 표현할 수 있다. 거울을 보면 내 눈에 전에는 없던, 무언가를 받아들이는 커다란 힘이 깃들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커다란 선물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과, 이가 덜덜 떨리는 공포와, 평생 뇌리에서 떠나지 않을 병원 복도의 어두운 풍경을 본 대가로.
엄마의 몸에서 엄마의 혼이 떠났을 때, 나는 그 싸늘한 몸을 보면서 몇 번이나 생각했다.
'아아, 엄마는 이걸 타고 여행을 했던 거야.'
그래서 나 역시 내 몸을, 자동차를 꼼꼼히 정비하듯 소중히 다루게 되었다. 기름이 하이옥탄인지 레귤러인지, 산길에 강한지, 눈이 내리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어떤 페인트로 도장을 하면 좋은지, 연비가 떨어지는 음식은 무엇이고 어떤 부담을 주는지. 내 몸을 자동차라고 생각하자 이해하기가 쉬웠다. 그리고 나는 예전보다 오히려 건강해졌다.

20. 왜 사람은 그런 상상이나 생각을 품게 되는 것일까? 사실은 병의 증세에 따라, 가족의 입장은 그때그때 얼마든지 달라지는데.
아마도 사랑하는 사람의 변화가 두려워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리라.

23. 사람은 죽는 순간까지 살아 있다. 절대 마음속에서 미리 묻어서는 안 된다.

31. 엄마가 살아 있을 때는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다. 한없이 자유롭다는 느낌과 앞만 보고 달리지 않으면 망가져 버릴 듯한 고독이 한꺼번에 내 것이 되었다. 그런데도 겉으로 드러난 것보다는 좋은 일인 듯한 기분이 들었다.

36. 겨울 하늘과 삼 층짜리 낡은 건물과, 울창한 숲 같은 정원, 메마른 식물의 달큰한 냄새와 톡 쏘는 고양이 오줌 냄새가 섞인 겨울 공기가 이곳에서만 결계 같은 역할을 하면서 싸늘하게 빛나고, 살아 있는 느낌이 들었다.
새소리가 마치 노랫소리처럼, 피리 소리처럼 드높게 울려 퍼진다.
저 너머의 먼 세계에, 내가 살아가는 일상이 있다. 자동차가 달리고, 집들이 있고, 대형 슈퍼마켓이 있고, 나날의 잡다함이 있고, 시끌시끌함이 있는 세계가.
아아, 고요하다. 발을 들여놓고 보니, 모든 것이 아주 평화롭다.

47. 인생의 톱니바퀴가 하나만 어긋났어도, 어쩌면 파리 같은 곳에서 이런 분위기의 여자와 함께 이런 생활을 했을지도 모른다.

49. 그림움이란, 모든 것이 달라진 후에야 비로소 싹트는 것, 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61. 아르헨티나 빌딩 안에서는 시간이 사람의 머릿속 힘으로 완전히 멈춰져 있으니까, 시간이 특별하게 흐르는 그곳에서는 과거와 현재의 나뉨이 없어서 그런 꿈도 꿀 수 있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75. 정말 아름다운 여자는, 보고 또 봐더 어떤 얼굴인지 기억할 수 없는 법이지.

77. 나는 유리 씨가 한 줌도 안 되는 아빠의 돈을 노리고 있다고 생각했던 나 자신이 너무도 부끄러웠다. 그렇게 부끄러운 일이란, 생각만 했어도 언젠가는 자신에게 되돌아온다는 것도 알았다.

79. 그 무렵 유리 씨는 낡고 어두운 집 속으로, 그 칙칙한 바탕색 속으로 조금씩 녹아드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아기만 유독 색깔을 띠고 도드라졌다. 바로 그것이 생명의 자연스러운 모습이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 배경에 점차 녹아들듯이 죽어 가는 삶이 옳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한다.

84. 한없이 먼 이국을 여행하는 것이나 자기만의 유적을 만드는 것이나 그 시도의 근원은 같다고 생각한다. 어떤 시대에서 어떤 시대로 여행을 하고, 끝내는 사라진다. 영원 속에 소박한 저항을 새기는 것, 그뿐이다.

87. 사람이 왜 유적을 만드는지 알아?
좋아하는 사람이 영원히 죽지 않고, 영원히 오늘이 계속되었으면 좋겠다고, 그렇게 생각해서일 거야.
그건 인간이 영원토록 지니는 허망한 바람인 거야. 그리고 위에서 보면 목걸이처럼 반짝반짝 빛나는, 신마저 부러워 매혹당하는 아름다운 빛의 알갱이지, 라고 유리씨는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