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day, October 31, 2014

요시모토 바나나- N. P.: 2014. 10. 31

26. 얼음주머니로 반은 가려진 시야, 고개를 움직여 창 밖을 보니 저녁 노을이었다. 핑크 빛 구름이 선명한 층을 이루며 저 너머 서편으로 이어져 있다. 순간, 열에 들뜬 머리로, 뭐가 현실에서 일어난 일인지 알 수 없게 되었다.
아버지가 집을 떠나, 이제는 다른 곳에서 가정을 꾸리고 있다는 것. 매일 밤 영어 공부를 한다는 것. 함박눈이 내려 교정이 온통 순백색으로 뒤덮였었다는 것.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이미 열 기운에, 가로등 불빛이 뽀얗게 보였다는 것.

28. 그날은 비가 내려, 학교에서 돌아온 언니와 나는 둘이서 전기난로를 사이에 두고 엄마가 돌아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드러누워, 잡지를 읽는 언니 쪽을 망연히 바라보고 있었다. 언니는, 팔락팔락 하고 물방울이 떨어지듯 일정한 간격으로 페이지를 넘겼다. 옆집에서 울리는 TV 소리가 빗소리에 섞여 들려왔다. 창문은 김으로 뽀얗고, 방은 더울 정도로 따뜻했다.

103. 이따금 상태가 안 좋을 때에 생각한다. 만약 부모가 헤어지지 않았더라면, 만약 독신생활이 이렇게 장기화하지 않았더라면, 만약에 그때에 언어에 눈뜨지 않았더라면, 쇼지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런 얽힘이 없었더라면, 나는 본래의 나였을까? 자유로운?

145. 흘러가는 시간을 뼛속 깊이 사랑스럽게 느낀다.

149. 옜날, 사람과 사람의 관계는 이렇지가 않았는데 말이지. 모두들 언제라도 한가하고 상냥했었어.

그렇다면 그녀의 매력은 무엇일까?
저 어딘가 색다른, 자립해 있는 재능의, 자기 충족적인 무언가. 타자와는 결코 나눌 수 없는. 그녀 자신만의 내면의 고뇌 같은 것. 몇 사람에게만 통하는 강력한 신호.

236. 스이가 어째서 살아 남으려고 했는가. 그런 까닭 따위 아무도 모른다. 살아 남아야만 하다고 느끼게 하는 것, 어째서 사는가? 그런 질문 따위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하게 하는 것, 삶과 죽음에 대해 생각하기를 멈추게 하는 그 무엇, 우리들은 그것을 늘 찾고 있는 것이다.

Saturday, October 11, 2014

에쿠니 가오리- 마미야 형제: 2014. 10. 12

84. 매미가 운다. 저녁 나절인데도 하늘은 아직 푸르고 여름 냄새가 난다.

121. 욕실 문을 열고 문지방을 넘어서서, 샤워 꼭지를 틀며 생각한다. 내가 좋아하는 남자는, 좋아했던 남자는, 내 몸을 마음에 들어 했을까. 한순간이라도 좋아. 다른 누구에게도 양보할 수 없는, 세상에 단 하나뿐인 존재로서 사랑해 주었을까?
세상에 단 하나가 아닌, 흔해 빠진, 어찌되든 상관없다는 듯이 아무렇게나, 요리코는 자신의 몸을 씻는다. 깊은 밤, 바깥에서 빗소리가 들려온다.

155. 가을은 쿠즈하라 요리코가 좋아하는 계절이다. 긴소매 셔츠의 산뜻한 감촉이 기분 좋다. 타이츠에 가죽 구두를 맞춰 신으면 발걸음도 힘 있고 등줄기가 꼿꼿이 펴지는 느낌이 든다.

224. 아무것도 모르면서 좋아하는게 아니라,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에 좋아하게 되는 건 아닐까. 아무것도 모르는데 마음이 끌리기 때문에, 좀 더 알고 싶어져서 다가가려는 게 아닐까.

245. 혼마 나오미는 추운 계절을 좋아한다. 눈이 내릴 정도로 추운 계절이 아니라, 그 직전의 딱 요맘때 같은 날씨. 공기가 팽팽하고 맑아서, 자신의 피부까지 투명해지는 느낌이다. 낙엽을 밟으며 걷는 감촉도 무척 근사하다.

288. 자신 안에서 너무나 많은 행복을 이끌어 낼 줄 아는 형제에게, 오늘과 내일은 언제나처럼 소박하고 즐겁게 흘러간다. 가끔은 의기소침하게 흘러갈지라도 이들에게는 연애와 또 다른 담백한 인간 관계가 있다. 추억을 나누고 즐거움을 나누고 일상을 나누는.. 어쩌면 현실에서는 그렇게 담백한 인간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연애에 빠지는 것보다 어렵지 않을까.
이 겨울, 따뜻하고 유쾌한 기운이 살아 숨쉴 것만 같은 형제의 집에 초대 받아 가고 싶다는 마음이 새록새록 들면서, 쉽게 달라질 것 같지 않은 형제의 그 후 이야기가 벌써부터 기다려진다.

Friday, October 10, 2014

요시모토 바나나: 허니문 - 2014. 10. 9

22. 밖에서는 태양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는데, 복도는 캄캄했다. 곰팡내와 향 냄새가 섞인 듯한 냄새가 났다. 그 조금은 서양식 분위기가 나는 낡은 일본식 집은, 천장이 매우 높았다. 빛은 모두 틈새로만 새어들고 있었다. 그 탓에, 여름이, 생명의 힘이 멀게 느껴졌다.

31. 짐으로 창문이 절반이나 가려져, 창모양의 절반만큼, 희미한 빛이 네모나게 다다미에 비치고 있었다. 나는 거기를 떠다니는 빛나는 먼지를 보면서 '그냥' 이라고 말했다.

32. 올리브와 함께 아직 젖은 채 빛나고 있는 길을 걸었다. 갑작스럽게 내린 비라서, 벚꽃이 우수수 떨어져 있었다. 동네 고등학교 옆을 오르는 벚나무 가로수길은 온통, 막 떨어진 예쁜 모양의 꽃잎으로, 분홍빛 카펫처럼 장식되어 있었다. 지는 햇빛을 받으며 서 있는 나무들에는 아직도 흐드러지게 꽃이 피어 있고, 물방울을 매단 채 싱그럽게 빛나고 있었다. 길에는 아무도 없고, 세계는 마냥 호화스런 금빛과 분홍빛 광선으로 가득하여, 이 세상이 아닌 듯한 광경이었다.
'올리브, 벚꽃 참 예쁘지'
하고 나도 모르게 말을 걸었다. 그러자 올리브는 새카만 맑은 눈으로 나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마치, 금빛지는 해보다, 벚꽃보다, 나를 보고 싶다는 표정으로. 그런 눈으로 보지 마, 하고 나는 생각했다. 보물과 줄줄이 이어지는 산과 바다를 쳐다보는 듯한 눈, 죽음은 딱히 두렵지 않다, 다만 너와 만날 수 없게 되는 것만이 안타깝다, 그런 눈이었다. 사실은 나도 올리브도 알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날의 분위기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모든 것이 너무 아름다웠다. 이미 볼품없어진 올리브의 털도, 금빛이었다. 모든 것이 우리 둘이 어린애였던 시절로 돌아가는 듯한, 어느 쪽이나 영원히 살아갈 듯한 느낌이 들었다.

49. 무지개를 만들면서, 흙탕물에 비친 아름다운 하늘, 흐르는 구름을 보면서 나는 생각했다. 이렇게 사소하고, 웃어넘겨 버리는 일이, 인생을 구성하는 세포라고.

72. 인생에는 때로, 그 사람이 원한다면, 하고 모르는 척하고 있을 수만은 없는 일이 있을지도 모른다. 직감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무언가를 위해 필사적이 되거나, 자신이 미덥지 않아도, 정체를 알 수 없는, 훗날이 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행동을 무슨 일이 있어도 하는 편이 좋은 일도 있을지 모른다.

89. 무언가가 우리만 두고 떠나간 듯한 느낌이 들어, 잠시 멍하고 있었다. 날씨는 좋고, 히로시의 오래된 집, 샤워기도 없는 목욕탕에 물을 받아, 환한 속에서 물에 잠겼다. 유리창에 김이 서려, 태양빛을 부옇게 통과시키고 있었다. 낡은 타일 특유의, 정겨운 색조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97. 혹 나의 많은 것들이 전부 잘못된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될 때, 나는 역시 늘, 사계절의 변화가 마치 다도처럼, 어디 한 군데도 빈틈없이 한 가지 일이 그 다음으로 흘러가는 것을 늘 뜰에서 보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피고 지는 꽃도, 땅으로 떨어지는 낙엽도, 그 다음에는 모두 어느틈엔가, 먼 곳에서 연결되어 있다. 인간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을까, 생각하고, 마음을 다잡았다.

105. 마술 같은 파란색 공기에 서서히 아침 햇살의 명랑한 기운이 섞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새벽은 무엇을 고백해도 용서받는 애매한 시간이었다. 꿈과 현실의 경계에서, 히로시는 그저 울기 위해 울었다.

114. 그냥 보통 때처럼 하고 있는데 무리를 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면 문제, 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러나, 나한테는, 언제나, 대개의 경우, 모두가 무리를 하고 있는 듯이 보였다. 왜 그렇게들 애를 쓰는지, 무엇을 향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렇다고 내 인생이 그렇게 멋진 일들로 충만해 있는 것도 아닌데. 나의 인생은, 뭔가 반짝반짝하는 것이 지나가고 난 다음의, 아련하게 반짝이는 꼬리 부분만을 향유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124. 그리고 눈이 내릴 것처럼 추운 긴자 거리를 걸어, 호텔까지 데려다 주었다. 엄마는, 있지, 마나카짱, 손 잡아도 돼? 라고 물었다. 나는 새엄마나 히로시와도 그런 적이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엄마는 억지로 내 손을 잡았다. 할 수 없어서, 마음을 바꾸어 즐겁게 걷기로 하였다. 그 손의 따스함과 공기의 싸늘함, 길 가는 사람들의 하얀 숨, 밤하늘을 배경으로 솟아 있는 와코 백화점, 미츠코시 백화점을 올려다보며 어째 외국 같네, 하고 생각한 것도, 잡은 손을 앞뒤로 흔들며 노래를 불렀던 일도, 정작 그때는 별일 아닌 것처럼 여겨졌는데, 인상에 깊이 남아 있다. 즐거웠던 것이다.
지난 일을 떠올리며, 그때 느꼈던 것보다 훨씬 더 즐거워질 수 있어, 그 사람의 소중함을 아는 때가 있다.

150. 세계는 나 따위 어떻게 되든 아무 상관 안하지만, 세계는 재미있고 아름답고 애정 같은 것으로 넘치고도 있고, 뭐가 있을지 몰라서, 그 안에서 헤엄치고 있는 나는 조금도 불쌍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어. 내가 밤바다를 떠다니는 천사 같은 기분이 들었어. 동네의 불빛도, 물도 별도 또렷하고 선명하고... 너무 천진난만하고, 청렴하고, 보호받고 있는, 떨고 있는 조그만 존재로 여겨졌어. 아주 멋진 장소에 있는 듯한... 그후로는, 전후를 불문하고 그처럼 감동적이고 아름다운 것을 본 적이 없다.

156. 강렬한 햇살 속, 별장으로 향했다. 새하얗고 낡은 별장이었다. 창문으로 여러 나라에서 온 신혼 부부와 돌고래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해변을 산책하고, 몸을 태우기도 하고, 다이빙을 즐기는 모습이 보였다. 섬의 태양빛은 물보다 몇백 배 정도는 하얗고, 몸 속까지 그 빛으로 넘칠 듯하였다. 천장에서는 천천히 선풍기가 돌아가고, 그 그림자가 바닥에 부드럽게 드리워져 있었다.
'너무너무 멋지다. 나, 이렇게 멋진 곳에 와보기는 처음이야. 빛은 강하고, 모래는 하얗고, 바다는 아름답고, 사람들은 모두 즐거워 보이고, 마치 천국 같아. 꿈속에서 보는 풍경 같아.'

Friday, September 19, 2014

에쿠니 가오리: 웨하스 의자: 2014. 9. 19

76. 내게 인생이란 운동장 같은 것이다. 입구도 출구도 없고, 물론 어딘가에는 있을 테지만, 있어도 별 의미가 없다. 무질서하고, 전진도 후퇴도 없다. 모두들 그곳에서, 그저 운동을 할 뿐이다. 나는 그곳에서, 어쩔 줄 몰라 한다.

86. 왜일까, 나는 어른인데, 때로 어린애의 시간에 갇혀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114. 나는 애인을 위해 그림을 그리는 것은 아니지만, 애인을 위해 하루하루를 살고 있으니까, 내게 그림을 그리는 것과 살아 있다는 것은 비슷한 일이다. 그러니까 결국은 애인을 위해서 그림을 그리는 셈이다.
언어는 아무 소용이 없다. 언어로 사고하려 하면, 늘 같은 자리를 맴돌고 만다.

120. 나는 지금 아파트 베란다에 있고, 활짝 연 창문으로 방안 공기를 환기시키려 한다. 방안에는 커피잔이 두 개, 그대로 놓여 있다. 밖은 춥고, 구름이 끼여 있고, 팽팽한 기운이 느껴진다. 베란다는 여전히 복작복작하고, 화분이니 빈 병이니, 망가진 캔버스가 쌓여 있다.

123. 애인이 돌아간 후의 방은 휑하고, 나답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침대에 동그마니 누워, 나는 어둠을 쏘아보고 있다. 절실하게, 줄리앙처럼 의연한 태도로 애정을 받아들이고 싶어한다. 백퍼센트의 신뢰와, 백퍼센트의 고독을, 피하지 않고 마음에 또렷이 새기고 싶다고.

나의 인생은 때로는 어린애의 그것처럼, 때로는 노인의 그것처럼 보인다. 절대 서른여덟 살 여자의 그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나는 갇혀 있다고 느낀다. 애인의 마음속에, 또는 어린애인 내 머리 속에.

132. 애인을 만나기 전에도, 누군가를 좋아한 적이 있는데. 어떻게 좋아하게 되었을까. 대체 어떤 남자들이었을까. 모든것이 너무 멀어서 마치 타인의 기억 같다. 내 자신의 과거가 타인의 추억담을 듣는 정도로만 느껴진다.
이 역시 내가 갇혀 있는 탓이다. 나는 갑자기 두려워진다. 그래서 다음에 애인을 만나면 꼭 말해야겠다고 생각한다. 누군가를 어딘가에 가둘 거면, 그곳이 세계의 전부라고 믿게 해줘야 한다고. 자유 따위 부여해서는 안 된다고.

134. 햇살.
나는 겨울 햇살의 양감을 좋아한다. 그것은 실로 풍성하게 나의 창가를 찾아준다. 아주 잠깐. 똑같다. 햇살도 동생이나 애인과 마찬가지로, 내 집을 찾아왔다가는 돌아간다.

141. 조명을 낮춘 침실은 어둡고, 샤워 코롱 냄새가 난다.
나는 애인 덕분에 이 세상에 겨우 발을 붙이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그것은 기묘한 감각이다. 애인이 전부라고 느끼는 것이 아니라 애인과 함께 있는 내가 전부라고 느낀다. 나는 그것을, 외롭다고 해야 하는지 충족돼 있다고 해야 하는지 몰라 혼란스럽다. 옳다고 생각해야 하는지 옳지 않다고 생각해야 하는지 몰라, 그만 생각을 포기한다.

144. 아무 부족함이 없다는 것은, 그 자체가 무언가가 결여돼 있다는 것이다.

156. 봄. 어느 날, 일터의 창문을 연 나는 봄이 왔다는 것을 안다. 늘 그렇다. 봄은 홀연히 나타난다. 공기가 달콤하고 부드럽게 풀어진다. 그것은 어제까지의 공기와 전혀 다르다.

164. 길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착각이야. 인생은 황야니까.

181. 나는 아틀리에에서 책을 읽고 있다. 봄햇살이 비치는 아틀리에에서. 애인은 어제, 일 때문에 여행을 떠났다.
여드레 간, 애인은 나의 세계 어디에도 없다. 애인의 부제에 이 거리의 모습이 바뀌고, 내 모습이 바뀐다. 나는 외로움을 느끼지 않는다. 어제까지의 나는 애인과 함께 어디론가 떠나고 말았다. 여기에 있는 것은, 애인을 만나기 전의 나다.
나는 해방된 기분이다. 하지만 그것은 자유가 아니라, 조그만 죽음 같은 것이다.

190. '보고 싶었어.'
나는 그렇게 말했지만, 그것은 진심이 아니었다. 보고 싶었다는 느낌이 든 것은, 방금 전이다. 그때까지는, 그런 생각은 꿈에도 없었다. 아무렇지도 않았다. 애인 따위 만난 적도 없다고 생각하면서 지냈다. 달리 방법이 없었다.
나는, 자신이 몹시 망가져 있다는 것을 안다.

206. 사람은 자기 좋을 대로 살 수 있어.

210. 여름은 입을 쩍 벌리고, 정체 모를 불안과 나른함으로, 그저 거기에 있었다. 한없이.
앞날이란 말 바깥쪽에서 나는 살고 있었다. 처음부터 내 의지와는 무관하게.
그것은 체력이 필요한 일이었다. 뭍이 없는 바다에서 혼자, 방향도 모른 채, 이유도 목적도 없이, 헤엄칠 줄 모르는데 헤엄쳐야 하는 것과 같았다. 그리고, 더욱 비장한 것은 나는 뭍이 있다는 것조차 몰랐다는 것이다.

인생에 절망한 것은 아니다. 그때부터 줄곧, 인생과 절망은 같았다.

213. 에어컨이 켜져 있어 실내 온도는 낮은데, 활짝 열어놓은 창문으로 뜨뜻미지근한 바람이 흘러든다. 햇살은 이미 기울었지만, 한낮의 열기가 아직도 여운을 남기고 있다.

246. 자신의 전 존재를 바쳐 애인을 사랑하는 여자에게 이미 그런 세상의 가치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홍찻잔에 곁들여진 각설탕이 홍차 없이는 의미를 갖지 못하듯, 애인 없는 자신의 삶은 무의미하기에 절망한 여자. 자신을 위해 그림을 그리지만 애인이 없는 상태의 자신은 이미 자기 자신이 아니기에, 결국은 애인을 위해 그림을 그리게 되는 여자. 이런 여자에게 사랑은 곧 절망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마치 어린애가 부모의 보호와 가정이란 울타리에 갇혀서야 존재를 지탱할 수 있듯이, 그녀는 애인의 사랑이란 울타리에 갇혀서야 존재를 유지할 수 있으니까요. 한없이 어른이기를 소망하지만, 애인의 품에 안기지 않으면 숨도 쉴 수 없기에 그녀란 존재는 외적으로는 어른이어도 한없이 어린애에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그녀가 어른이기를 주장하고, 절망을 벗어던지려 할 때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애인과의 헤어짐이고, 이 헤어짐은 곧 그녀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Saturday, September 13, 2014

에쿠니 가오리- 언젠가 기억에서 사라진다 해도: 2014. 9. 13

125. 때로는 엄마가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내가 너무 어린 탓이 아니라 엄마가 나이를 너무 먹은 탓이라고 생각한다. 이 둘은 똑같지 않다. 전혀 다른 차원이다. 무언가를 이해하기에 아직 어리다면 언젠가는 이해할 때가 온다. 하지만 무언가를 이해하기에는 너무 늙었다면, 그 사람은 영원히 그것을 이해할 수 없다. 그것은 아주 슬픈 일이다.

147. 일단 한 번 죽은 후에 다시 사니까, 야, 그거 편하던데.

일단 죽은 후에 다시 산다. 그 말이 나의 뇌리에 또렷하게 각인되었다. 일단 파괴한다는 것. 나 자신은 물론 주위까지.
하지만 동시에 나는 알아버렸다. 파괴하면 돌아갈 장소가 없어진다는 것을. 이런 곳에서 일하면서 여름휴가 때나 설날 때나 홀로 아파트에서 지내고, 아르바이트하는 여고생에게 친구 대접이나 받는 오니시 씨처럼.

161. 오이의 초록은 어쩜 이리도 예쁠까. 표면의 짙은 초록과 가로로 동그랗게 잘랐을 때의 싱그럽고 엷은 초록.
밖은 비. 나는 부엌에서 혼자 오이를 바라보고 있다. 오이는 거의 늘 냉장고에 들어 있으니까, 보고 싶을 때 볼 수 있다. 오이가 늘 냉장고에 있다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원할 때 수중에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빗소리. 창문과 베란다 난간과 나무 잎사귀에 내리는 빗소리. 비 오는 날의 부엌은 조금 쓸쓸하다.

181. 어두운 밤의 베란다에서, 멀리 반짝이는 역사의 불빛을 보면서 아이들의 귀가를 기다릴 때, 흐릿한 오후, 밀린 설거지를 하면서 부엌 창으로 건녀편 아파트 베란다에서 흔들리는 빨래를 보았을 때, 모두 잠든 깊은 밤, 수도꼭지에서 똑똑 떨어지는 물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릴 때, 어쩌다 올려다 본 하늘에서 구름이 꼼짝도 하지 않아 마치 긴 시간이 정지된 것처럼 느껴질 때... 그런 때면 기억 창고 속의 내가 지금의 나를 마치 다른 사람 보듯 바라보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든다. 그러니, 나는 있는 것이다. 어디엔가, 내가 모르는 어느 깊은 틈 속에.

Monday, August 25, 2014

에쿠니 가오리: 취하기에 부족하지 않은: 2014. 8.15

116. 발바닥이 보송보송하고 따스할 것! 행복의 첫째 조건이다.

139. 내게 목욕은, 현실을 떠나 다른 공간으로 가는 짧지만 결정적인 타임 슬립이다. 그러니까 타월이나 로브는 현실로 돌아온 첫 순간 내 몸에 닿는, 이른바 내가 있어야 할 현실 세계의 대표인 셈이다. 그러니 폭신폭신하고 보송보송하고 따뜻하기를 바란다.

144. 가슴에 세계의 끝을 품은 자는 세계의 끝으로 가야 한다.

외로움은 언제나 신선하다.

그래서 또 다른 곳에서는 '좋아하는 것'에 착안해서 '잠자기', '놀기', '핫초콜릿', '보송보송 따스한 남자의 손'이라고 써본다.

171. 이제 곧 여름이 온다는, 계절의 변화에 대한 반가움일까. 실제로도 여름의 해거름에는 각벼한 분위기가 있다. 그리움이라 해도 ㅈ호고 애매함을 허용하는 공기라 해도 좋을 무언가가.
계절의 변화에는 정말 과묵하고 압도적인 평온함이 있다. 사람들이 날마다 어떤 문젯거리로 골머리를 썩고 얼마나 우왕좌왕하며 살아가든 아무 일 아니라는 듯이, 때가 되면 계절은 어김없이 바뀐다. 아주 오랜 옛날부터 그랬던 것처럼. 문득 그 사실을 깨달아, 기쁘고 평온해지는지도 모르겠다.

182. 폭소는 원한다고 쉬이 얻어지는 게 아니다. 폭소는 돌아오지 않는다.
키득, 한 번 웃고 말 사건이나 농담은 나중에 다시 생각하면서도 키득거릴 수 있고, 다른 사람에게 전하면 그 사람 역시 키득 웃을 수 있다. 하지만 폭소는 그렇지 않다.
폭소는 일종의 광기, 조그만 광기라고 생각한다.
한 인간의 내면에서 무언가가 무언가를 건드리는 것이다. 건드림을 당한 쪽의 무언가는 그 사람의 인생 전체와 연결된 것이고, 그 근간이 깊은 혼돈 속에 있기에, 웃음이 끝없이 터져 나온다. 끝없이 재미가 이어진다.
10대를 가리켜 바람에 구르는 낙엽만 보아도 재미나는 시절이라고 한다면, 그 나이 때가 별 자가 없이 광기를 드러내기 쉬운 시기인 것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폭소를 터뜨렸을 때의 일을 생각하면, 대체 뭣 때문에 그렇게 웃었을까 의아한 경우가 많다. 극단적으로는, 웃으면서도 뭐가 그렇게 우스운지 모른다는 것을 알기도 하고, 또 그렇게 말하기도 한다. 웃고 있는 동안, 그 웃음이 다른 감정을 환기한다. 그리고 누구와 함께 그렇게 웃고 있다는 것에 대한 감상- 기쁨, 행복감 혹은 반대로 기묘함, 걱정, 자포자기하는 마음, 이런저런-과 이어지면서 웃음이 박차를 가한다.

189. 절대 돈의 문제는 아니다. 케이크를 스무 조각씩 사도 아무도 뭐라 하지 않고, 아무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것. 주위의 눈치를 살피며 움찔거리지 않아도 된다는 것. 아마도 다른 사람들은, 손님이 꽤나 많이 오는 모양이지, 하고 상상할 거싱다.
모르는 사람이 있는 곳에서 움찔거리지 않아도 된다는 건 참 마음 편한 일이다. 자유를 그렇게 정의해도 좋지 않을까 싶을 만큼.
운전을 하든 말든, 케이크를 몇 개 사든, 다 내 마음이란 사실이 때로 놀랍고, 실제로도 놀란다. 아직도 그 사실에 충분히 적응하지 못한 것이다.

190. 복잡한 전철을 탔을 때면 간혹 생각한다. 모두들 당연하다는 표정으로 어른처럼 행동하고 있지만, 사실 과거 어느 때에는 모두 어린애였다. 거짓말을 하고 투정을 부리고 울고 떼를 쓰고 목욕을 싫어하고 잠자다 오줌을 싸고 이를 닦지 않는 어린애였다. 그런 생각을 하면 신기하면서도 끔찍하다. 말이 통하는 어른 같은 얼굴을 하고 있지만, 말이 통하지 않는 어린애가 성장했을 뿐이다. 그러니 믿을 수 없다.
어린이에게는 세계가 온통 불합리하다. 내게는 그 시절의 기억이 아직도 절절하게 남아 있다.

192. 우리네 눈에는 그저 자잘하고 사소하기만 한 것들이라서 늘 무심히 스치고 지나갈 뿐, 새 생명을 부여하지도, 새로운 의미를 찾아내지도 못하지요.

그래서 그녀의 에세이를 읽는 즈거움은 작은 것들에 쏟아지는 애틋함과 작은 것들마저 놓치지 않는 늘 깨어 있는 의식과 새로운 의미를 탄생케 하는 애정 어린 숨결을 느끼는 즐거움이며 그녀의 일상을 엿보는 동시에, 그런 것들이 그녀의 작품에서 어떻게 살아 움직이는지를 알게되는, 그런 즐거움입니다.

Sunday, August 3, 2014

야마다 에이미- 돈 없어도 난 우아한 게 좋아: 2014. 8. 3

20. '너'라고 불리는 것도 좋은 일이다. 상대에게 살짝 얕보이는 느낌이 든다. 좋아하는 남자가 자신을 얕보는 걸 흐뭇하게 느낄 때, 사랑하고 있구나, 하고 생각한다.

22. 지금까지 사카에만의 공간이었던 이 집 구석구석에 내 냄새가 스며든다. 사카에가 건네준 보조 열쇠를 처음 사용하던 날의 흥분은 지금도 잊지 못한다. 열쇠 구멍에, 나를 불어넣었다. 그 소리, 찰칵. 무언가를 덥석 깨문 기분이었다. 남자가 먹어도 된다고 허락한 것은, 생활의 터전 모두. 그는 무척이나 친절하다. 몸은 물론 갖가지를 내게 던져 준다. 내던지는 그 멋진 폼. 자신의 세계를 소중히 여기지 않는 것도 아름다움이라는 느낌이 든다. 집착 따위를 매력의 하나로 생각하는 저자의 남자들과는 차원이 다르다. 그래서 그렇게 말했더니, 나 애당초 별다른 세계 갖고 있지 않았어, 하며 그가 웃는다. 별거 없는 세계. 그것이 얼마나 삶을 편안케 해 주는지.

35. 남들이 생각하는 듬직함과 ㅐㄴ가 원하는 듬직함은 결정적으로 다르다. 나는 체격이 크고 경제력이 있다고 안심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저 편리함에 지나지 않는다. 가령 내가 하려는 말을 정확하게 알아듣는 사람을 만났을 때, 듬직하다 싶어 눈시울이 뜨끈해진다. 허풍처럼 들릴지 모르겠지만, 정말이다. 그런 순간, 나 자신도 놀랄 만큼 말이 많아진다. 손님을 대하는 장사를 하는 주제에 무뚝뚝하기로 자타가 공인하는 나이지만, 전하고 싶은 말이 쏙쏙 전해지는 사람 앞에서는 엄청난 수다쟁이가 된다. 하지만 그런 걸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사귀다 헤어진 몇몇 남자와 많지 않은 친구들 말고는. 나는 어쩌면 남들 눈에는 외롭게 나이만 먹은 여자로 비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정녕 외로움을 느끼는 때는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과 방글거리며 관계해아 하는 경우이다. 통하는 말이 얼마 안 되는 사람과 가까스로 소통해야 하는 장면에 부딪치면, 왠지 모르게 비참해진다.

48. 그는 나날의 식량을 귀여워하고 있다! 나는 이렇게 일상을 어여삐 여기는 사람을 달리 모른다.

다다미 위에 누워 옆에 있는 책을 뒤적거리다 보니 잠이 왔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비가 내리고 있다. 빗방울이 빗물 통을 규칙적으로 두드린다. 왠지 마음이 착 가라앉는다. 옜날 집의 효과다.

67. 경험은 사람에게 배움을 선사하지만, 사람을 강하게 하지는 않는다. 강한 척하는 기술을 터득하게 할 뿐, 오히려 나는 점점, 겁쟁이가 되어 가고 있다. 겁날 것 없던 때가 그립다. 하지만, 이미 돌아갈 수 없고 돌아가고 싶지도 않다. 겁쟁이임을 스스로 알기에 잃고 싶지 않은 것에 대한 강렬한 욕망에 몸을 맡길 수 있다. 경험이 일궈 낸 풍요로운 겁쟁이.

80. 소극적인 룰이 남녀 사이에 적용되는 순간, 열은 이내 정상으로 돌아간다. 예의 바른 연애가 따분하다는 것은 고릿적에 알아 버렸다. 착함이란 아이들만의 특권이다. 그리고 버릇없음이란 어른에게만 허가되는 특허다.

100. 아까워 내밀지 못한 마음은 쓸모가 없어지고 끝내는 유통 기간마저 지나고 만다. 그런 것들만 마음에 꼭꼭 보존하다 보면 새로운 마음이 들어찰 장소가 없어진다. 그태껏 나는 상대를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을 늘 아까워한 탓에 결국은 썩어 버리게 했다.

하지만 사카에에게는 마음껏 애정을 쏟는다. 따뜻한 물을 펑펑 쓰듯 함부로 쓴다. 그래도 나는 언제든 촉촉하게 젖어 있다. 왜냐하면 그 역시 편리한 남자로 내게 애정을 하염없이 쏟으니까. 영원히 타인 우선을 신조로 하는 너그러운 인간은 될 수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제 겨우 알았어. 나를 위해 그래 줄 수 있는 인간을 위해서라면, 쉽사리 한 발 물러설 수 있다는 것을.

107. 사카에는 다른 남자들이 젊은 여자의 몸을 칭찬하는 것처럼 평범하게 치켜세우지 안흔ㄷ나. 내가 나인 증거를 찾아, 그 점을 칭찬해 준다. 그가 말하기를, 지우의 몸에는 결점이 없다나. 정말 고마운 말이다. 툭 튀어나온 배는 큐피처럼 유머러스하단다. 여기가 갓난아기처럼 귀여워, 란다. 푸훗, 눈물이 날 지경이다.